설날 유래

  • 기사입력 2018.02.13 19:26
  • 기자명 김문규 발행인
발행인 김문규
발행인 김문규

  예전에는 설 전날을 아치 설 또는 아찬 설이라고 불렀다.

  아치는 순수 우리말로 작다는 뜻이다.

  아치라는 말이 차츰 잊혀지면서 음이 비슷한 까치로 바뀌어 동요가사에 사용됐다고 한다. 또 신라 소지왕 때 황후가 한스님과 내통해 왕을 해하려했지만 까치(까마귀), 쥐, 돼지, 용의 도움을 받아 위기를 모면했다고 한다.

  소지왕이 쥐와 돼지, 용은 12간지 동물로 기념할수 있지만 까치를 기념할 날이 없었기에 새해 전날을 까치설로 기념 했다고 한다.

  원래는 까마귀설 이었지만 옛날 왕들은 삼족오(발이 셋 달린 까마귀)를 영물로 여겨 삼족오를 국가의 상징물로 여기기도 했었다. 그러다 어느 시기부터 까마귀를 금기시하다 보니 까치가 영물이 되었다고 한다.

  우리 민족의 고유한 설날 세시풍속이란 일년 중 철따라 행해지는 자연과 인간의 삶에 관한 행사를 말한다.

  예전의 설날은 해와 달과 별이 사계절을 처음 운행하는 시기라고 인식했다.

  봄이 시작되는 날이면 만물이 생자하는 때라는 뜻에서 정조(正祖)임금이 국정(國政) 일기인 일성록(日省錄)에 매년 설날 아침에 농사를 장려하는 윤음을 내린 것은 제때에 미리 단단히 타일러 경계하려고 해서다.

  우리가 지닌 고유의 가치는 조상대대로 물려받은 총체적인 전통문화의 계승을 통한 특유한 저력이 있다.

  설날에는 어른, 아니, 일꾼들까지 새 옷을 입었다. 설빔을 입는 것을 세장이라고 하고, 어른을 찾아뵙고 인사를 올리는 것은 세배라 한다. 설음식을 대접 하는 것을 세찬이라고 하며 이때 같이 마시는 술을 세주라 했다.

  한해의 소망을 써서 대문이나 문설주에 입춘대길, 만사형통, 건양다경 등 좋은 글을 써붙이고 한해의 안녕을 기원했다.

  설날은 원일(元日), 원단(元旦), 세수(歲首) 등으로 불렀다.
  설날이 근대에 들어서 숱한 우여곡절을 겪었다.

  1895년 고종 황제 때 처음으로 태양력을 사용했다. 광복 후에도 태양력 1월 1일 신정이 장려됐다. 그러나 24절기에 따라 농사를 짓는 농민들은 전통의식인 음력설(구정)을 설날로 삼았다. 1985년 음력설을 민속의 날로 정하고 하루를 공휴일로 지정했다가 1989년 음력 설날을 전후한 3일간을 공휴일로 지정했다.

  신정과 구정의 오랜 갈등 끝에 설날의 민족 최대 명절로 자리 잡았다.

  오천년의 역사 속에 봄에는 씨 뿌리고, 여름에 땀 흘려 가꾸어 가을이면 곡식을 거두어 의식주를 해결했다.

  이처럼 농사일이 해마다 반복되는 가운데 풍속과 관습이 생활문화의 근간이 되었다. 우리 조상들은 농경을 중심으로 고대 태음력에 따라 세시의 연중 행사가 진행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우리고유의 명절인 설날이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것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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