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성출신 김상조씨 경주 숭혜전 제146대 전참봉 도임

  • 기사입력 2018.08.28 21:36
  • 기자명 김종국 기자
▲ 숭혜전 전정에서 봉행되는 김상조 전참봉의 행공례
▲ 숭혜전 전정에서 봉행되는 김상조 전참봉의 행공례

  2018년 8월 18일 오전 10시 경주시 황남동에 소재한 숭혜전(崇惠殿)에서 경북 경산시 용성면 출신 김상조(74)씨가 숭혜전 제146대 전참봉으로 도임하였다.
  이날 도임식(到任式)은 먼저 신라숭혜전 전통의례에 따라 도임하는 전참봉은 도포(道袍)차림으로 경모재(敬慕齋)에서 본부참봉(전참봉, 계림세묘참봉, 미추왕참봉, 내물왕참봉을 호칭)으로부터 오전 9시에 망지(望紙)를 받고, 영육재(永育齋)에서 청관복(靑官服)으로 개복한 후, 곧 숭혜전 전정에서 행공례(行公禮 : 숭혜전의 공식적 도임행사로, 사가(私家)의 고유제와 같은 성격) 및 봉심(奉審) 의례를 봉행하고, 다음 의례는 계림세묘, 미추왕릉의 행공 및 봉심의례로 이어졌다. 
  이 자리에는 200여명의 경주시 인접 지역유림, 자인향교 전교(배현묵, 77), 전 자인향교 전교(천기찬, 81), 경산시유림연합회장(손석호, 70), 전 도동서원 원장(이주로, 78), 관란서원 원장(박순봉, 77), 경주 김씨 용성면종친회(김규환 총무, 68), 등 경산시 유림 및 종친 대표와 숭혜전 역대 참봉, 기관단체장으로 김석기 국회의원, 김장주 전 경상북도 행정부지사, 경북도·시위원 등 다수 내빈들이 하객으로 참석한 가운데 김상조 전참봉의 도임행사가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 망지를 전달받고 있는 제146대 김상조 숭혜전 전참봉
▲ 망지를 전달받고 있는 제146대 김상조 숭혜전 전참봉

  오전 10시 식전행사로 숭혜전 참봉 망지가 전달되면서 시작된 이날 행사는 헌관실에서 개복된 후 뒤 본행사로서 숭혜전과 계림세묘, 미추왕릉에서 행공례 및 봉심례를, 다시 경모재에서 상견례를 하는 순으로 진행됐다.
  김성조(74) 신임 숭혜전 전참봉은, 신라 김씨의 비조인 대보공(휘 김알지)후손들을 대표해서 자신의 여력을 숭혜전 참봉의 소임에 성실할 것이라 피력한 후, 2년간의 임기에 들었다.
  김상조 숭혜전 전참봉은 경북 경산시 용성면 덕천1리 출신으로 경북중·고등학교, 영남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서 대학원을 졸업한 후, 부산 ㈜동국제강, 국제종합기계(주) 대표이사직을 거쳐 퇴임 후 선조님들의 고향에 귀농하여 남천서원을 관장하여 왔던 인물로, 조선시대 자인현 복설에 앞장섰던 취죽당 김응명 선생의 직계후손이기도 하다.

  앞으로 김상조 전참봉은 임기 2년 동안 신라 숭혜전릉 행사의 모든 제향을 관장하게 된다.

▲ 대릉원 미추왕릉을 향하는 신임 김상조 전참봉
▲ 대릉원 미추왕릉을 향하는 신임 김상조 전참봉

  이전에도 경북 경산시 용성면 출신 경주 숭혜전 전참봉으로 당시 초대 용성면장을 역임한 김성호(金聖鎬, 재임 1910~1928)씨가 숭혜전 제105대 전참봉직을 역임한바 있으며, 제146대 숭혜전 전참봉으로 도임한 김상조 참봉은 용성출신으로 이번이 2번째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의하면, 본래 참봉(參奉)은 조선시대 각 관서의 종9품 관직으로, 종친부(宗親府)·돈녕부(敦寧府)·봉상시(奉常寺)·사옹원(司饔院)·내의원(內醫院)·예빈시(禮賓寺)·군기시(軍器寺)·군자감(軍資監)·제용감(濟用監)·선공감(繕工監)·관상감(觀象監)·전의감(典醫監)·사역원(司譯院)·사재감(司宰監)·전연사(典涓司)·소격서(昭格署)·사직서(社稷署)·전생서(典牲署)·혜민서(惠民署)·전옥서(典獄署)·활인서(活人署)·오부(五部), 그리고 각 능(陵)·전(殿)과 원(園)에 배속되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이에 돈녕부 참봉은 1470년(성종 1) 4월에 처음 설치, 『경국대전』에 수록되었으며, 봉상시·내의원·군자감·제용감·선공감·사재감·관상감·전의감·전연사·전생서·혜민서·전옥서·활인서의 참봉은 1466년(세조 12) 1월에 설치되어 사옹원·소격서·사직서·오부와 각 능·전과 원의 참봉은 1466년 1월 이후에 각각 설치되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경주시와 숭혜전의 전승 기록에 의하면, 숭혜전(崇惠殿)은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256호로, 신라 왕조의 김씨 최초의 임금인 제13대 미추왕(味鄒王, 味鄒尼師今)과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룩한 제30대 문무왕(김씨 15대), 그리고 신라 마지막 제56대 경순왕(김씨 38대)의 위패를 모신 전각으로, 원래 숭혜전은 제56대 경순왕의 유덕을 기리기 위하여 처음 월성에 사당을 지어 영정을 모시고 제향한 후, 조선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어 이후부터는 위패를 봉안하여 제향하여 왔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후 조선 인조 5년(1627)에 이르러 경상도관찰사 김시양(金時讓)이 본 사당을 배알 한 후 중건하기를 계청(啓請)하여 경주 동천촌(東泉村)에 새로 사당을 지어 “동천묘(東泉廟)”라 하였고, 경종 3년(1723)에 경상도 관찰사 조태억(趙泰億)이 조정에 청원하여 “경순왕전(敬順王殿)”이라 선액(宣額)을 받았으며, 정조 16년(1792)에 정전(正殿) 뒤에 사태로 정조 18년(1794)에 참봉 김건항(金建恒)이 이건을 호소하자 경상도 관찰사 조진택(趙鎭宅)이 지금의 자리로 이건한 후 전호(殿號)를 “황남전(皇南殿)”이라 하고, 장수승(長水丞) 이명기(李命基)가 영천 은해사에서 동천묘로 이봉했던 경순왕 영정을 개모(改摸)하여 봉안하였다 한다.
  고종 24년(1887)에는 김만제(金萬濟)의 소청으로 미추왕의 위패를 모시게 되었고, 그 이듬해에 판부사 김홍집(金弘集)의 주청하여 문무왕의 위패도 함께 모시게 되어 고종이 경주부윤 김철희(金喆熙)로 하여금 사당을 증축하게 한 후 전호(殿號)를 “숭혜전(崇惠殿)”이라 하였던 것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숭혜전 소장되었던 경순왕 영정은 모두 5점으로,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10호로 지정, 국립경주박물관에 기탁하였고, 지금의 영정은  1904년 화공 이진춘(李瑨春)이 그린 모사본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밖에도 경내에는 숭혜전의 외삼문에 해당하는 숭혜문과 내삼문에 해당하는 숭혜전 사당 출입문이 앞면 5칸에 맞배지붕으로 숭혜전 사당 뒷문으로 대릉원내에 있는 미추왕릉과 연결되어 있다.

▲ 대릉원 내 미추왕릉 전경
▲ 대릉원 내 미추왕릉 전경

  현 경주시 황남동에 소재한 대릉원에는 천마총, 황남 대총, 미추왕릉 등의 신라 당시 고분 20기가 보존되어 있으며, 여기에 미추왕릉은 흙을 둥글게 쌓아 올린 거대한 무덤으로, 내부는 돌무지덧널무덤으로 알려지고 있다.

  본래 이 왕릉은 미추왕릉, 죽장릉, 죽현릉이라 하였다가 현재는 다시 능호(陵號)를 미추왕릉이라 고쳤다 하였으며, 《삼국유사》권 제1〈기이〉제1, 미추왕(未鄒王)과 죽엽군(竹葉軍), 《삼국사기》권제2, 신라본기 제2, 유례니사금조에 등장하는 죽엽군(竹葉軍)에 관한 기록은 미추이사금(味鄒尼師今) 관련 사료적 가치를 보태고 있다.
  본 기록에는, 유례왕 14에 이서고국(伊西古國)이 금성(金城)을 침공해오자 신라가 크게 군사를 일으켜 막아도 물리치지 못하였는데, 이 때 갑자기 이상한 군사가 나타났는데, 그 수효는 셀 수 없고 모두 귀에 댓잎〔竹葉〕을 꽂고 신라군과 함께 적을 쳐 깨뜨렸다고 한다. 그 뒤 그들이 간 곳을 알지 못하던 중 누가 미추왕릉에 댓잎이 수북하게 쌓여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하자, 사람들은 미추왕이 죽어서 비밀스러운 병사로 도와준 것이라고 하였고, 또한 동 기록에 병기한 제36대 혜공왕 재임 당시 미추왕릉에서 벌어졌다는 김유신, 미추왕 사이에 주고받았다는 대화 내용을 통하여 강건하였던 김씨 왕조의 위상과 이들과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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