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으로 보는 영천성 수복전투 기획전”
“기록으로 보는 영천성 수복전투 기획전”
  • 김종국 기자
  • 승인 2018.09.14 2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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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서 자인현 최문병 의병장을 만나다.
▲ 영천역사문화박물관장의 내빈 소개에 이어 참석 기관단체장의 축사

  지난달 29일 오후 2시, 임진왜란 426주년을 맞이하는 '경북연합의병부대 창의정용군의 영천성 수복전투' 기획전이 경북 영천시민회관에서 영천역사문화박물관(관장 지봉스님) 주관으로 열었다.
  이날 기획전에는 영천시 복성(復城) 전투에 참여한 권응수, 정대임, 최문병 의병장을 비롯한 당시 출정 의병장의 문중후손 다수와 영천시 기관단체장, 영천○○부대 장병, 시민 다수 등 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관행사와 이를 기획한 영천역사문화박물관장(용화사 주지 지봉스님)의 기획전 경과보고 순으로 진행되었다.

 본 기획전은 지난  8월 29일부터 영천성 복성기념일인 9월 2일까지 5일간에 걸쳐 전시되면서 그동안 잊어져 왔던 영천성복성전투에 대한 이해를 돕는데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에 대하여 영천역사문화박물관장은,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은 영천지역의 임진왜란 당시 영천성 수복에 대한 수집 자료를 집대성하는 기획전을 열 수 있었다는 점을 매우 뜻 깊게 생각한다.”면서 그동안의 소회를 피력하였다.
본 기획전은 실물전시와 패널형식 전시를 곁들였으며, 전체적 구성기법은 스토리텔링 형식을 가미한 전시방법으로 관람자들의 이해와 호응을 모았다.

▲ 유사 분야별 파티션으로 구획 실물 기록과 패널을 통해 스토리텔링화 하였다.

  특히 패널의 구성은 수집한 영천성복성전투 장면을 그림으로 재구성하여 실감을 보탬으로 동서남북 4개의 성문 위치와 군사 배치, 이동 상황 등을 유추할 수 있다는 점 등은 사설박물관의 전시기법으로 돋보이는 사례로 주목되었다.

▲ 영천성 복성전투 재현도
▲ 영천성 복성전투 재현도

  임란 직후 출간된 권응수(權應銖)의병장의 백운재실기에 의하면,
  1583년 별시무과에 급제, 수의부위권지(修義副尉權知)를 거쳐 훈련원부봉사(訓鍊院副奉事)로서 의주용만을 지켰으며, 그 뒤 경상좌수사 박홍(朴泓)의 막하에 있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향에 돌아가 의병을 모집하여 궐기했다. 이 해 5월부터 활동을 전개해 여러 곳에서 전과를 올리고, 6월에 경상좌도병마절도사 박진(朴晉)의 휘하에 들어갔다가 7월에 각 고을의 의병장을 규합해 의병대장이 되었다 하였으며, 이 무렵 영천에 있던 적군은 신녕·안동에 있던 적군과 연락하면서 약탈을 일삼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공격할 계획을 세우고 7월 14일 적을 박연(朴淵)에서 치고, 22일에는 소계(召溪)·사천(沙川)까지 추격해 격파했다 한다.
  한편 이날 군세를 정비하고 영천성 공격을 위해 선봉장에 홍천뢰(洪天賚), 좌총(左摠)을 신해(申海), 우총(右摠)을 최문병(崔文柄), 중총(中摠)을 정대임(鄭大任), 별장(別將)을 김윤국(金潤國)으로 삼았다.
25일 군사를 동원해 공격을 시작하고 26일에는 결사대원 500명을 뽑아 적진으로 돌격해 크게 격파했다. 다음 날에는 화공(火攻)으로 대승, 영천성을 수복했다.
  또한 동 실기 부록 영천복성기(永川復城記)에는 복성 당일 병력 동원에 하양(河陽), 자인(慈仁), 청송(靑松), 의흥군(義興郡) 등에서 3,560여명의 의군들이 본 전투에 참여하였다 하였고, 이에 동원된 병력은 모두 3부로 나누어 영천성복성을 시도, 이에 우총 최문병 의병장의 지용(智勇)이 출범(出凡)하였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본 기획전에는 당시 영천성 복성에 우총(右摠)을 맡아 혁혁한 공적을 세운 성재 최문병 의병장의 기록을 찾아보기 위하여 의병장의 직계후손인 영천최씨원당문중 회장 최용석(74, 13세손)을 비롯한 최경진(77), 최재근(52), 최극지(75) 등 다수가 본 기획전에 참석, 최문병 의병장의 영천성복성기록 등을 살펴보면서 문중에서 소장하고 있지 못한 선생의 실기 원본과 여타 기록 등에 대하여 회안이 가득하였다.

▲ 당시 권응수 의병장의 우총(右摠) 최문병(崔文柄) 의병장의 코너
▲ 당시 권응수 의병장의 우총(右摠) 최문병(崔文柄) 의병장의 코너

  성재선생실기(省齋先生實記)는 최문병 의병장의 시문집으로, 모두 4권 2책으로 최문병의 증손 최영기(崔永基)가 편집하여, 1784년(정조 8) 7대손 최덕찬(崔德燦)이 간행하고, 12대손 최석렬(崔奭烈)이 중간하였다. 그 뒤 1982년 12대손 최기열(崔基烈)이 국역하여 개간하였다. 권두에 채제공(蔡濟恭)·장석룡(張錫龍)·장승택(張升澤)의 서문, 권말에 이광정(李光靖)·정약용(丁若鏞)의 발문을 붙였다.
  본 실기는 목판본으로, 권1에 오언절구 5수, 칠언절구 10수, 서(書) 3편, 세계도(世系圖), 권2∼4에 부록으로 연보·창의록(倡義錄)·청도동고록(淸道同苦錄)·서악동고록(西嶽同苦錄)·팔공산회맹록(八公山會盟錄)·유사·행장·묘비명·묘지명·신도비명(神道碑銘)·초유문(招諭文)·상량문·봉안문·축문·통문(通文)·임진기사(壬辰記事) 등이 수록되어 있다.
  시는 주로 친구를 그리워하는 돈독한 우정과 강호에서 안빈낙도하는 자신의 유유자적하고 한가로운 생활, 나라와 백성을 근심하는 우국충정 등을 주제로 하고 있다. 「춘일우음(春日偶吟)」과 「유금학산사(遊金鶴山寺)」에서는 세상의 용렬한 인사들이 강호에 숨어 사는 자신의 뜻을 알지 못함을 한탄하였다. 「춘일천변소게음(春日川邊少憩吟)」에서는 자신의 유유자적한 심사와 풍류의 마음을 신선한 비유와 질박한 시어로 그려 내었다. 「대우김우련박몽량설작(待友金遇鍊朴夢亮設爵)」은 친구에 대한 그리움을 소박하고 참신한 시어로 곡진하게 표현하고, 「두곡진중답박제우당경전(杜谷陣中答朴悌友堂慶傳)」과「제판서한공종유참왜처유감(祭判書韓公宗愈斬倭處有感)」에서는 끓어오르는 장렬하고 비장한 충정을 노래하기도 하였다.
  서의 「답박제우당서(答朴悌友堂書)」는 임진왜란 당시 이웃 고을의 의병장 박제우의 원병 요청에 대한 답서이다. 이밖에 부록의 「창의록」·「청도동고록」·「서악동고록」·「팔공산회맹록」 등의 기록에는 임진왜란 당시 영남 지방의 창의에 참여한 유생들의 명단이 그 직위별로 자세히 수록되어 있다. 당시의 창의 규모, 의병들의 활동 상황, 우국충정으로 뭉친 의병들의 용감한 전투와 그들의 기상 등이 기록되어 있어, 임진왜란 당시의 실상과 상황을 파악하는 데 참고 자료가 된다.
  최용석 회장의 증언에 의하면, 본 실기는 원본 간행이후 현 용계서원(龍溪書院)의 수장고에 보관 하여 왔으나, 이후 어느 날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하며, 한 수집가의 노력에 참회(慙悔)하였다.

▲ 금반 기획전에 전시된 성재선생실기 원본 중 1권
▲ 금반 기획전에 전시된 성재선생실기 원본 중 1권

  그날 영천성복성 현장 한 기획전에서 이들은 최문병 의병장을 만날 수 있었고, 그의 용맹은 빼곡히 적힌 패널을 통해 다시 읽을 수 있었다.
  되짚어 보면 성재 최문병 의병장은, 1592년 4월 15일, 양산에서 온 피난민으로부터 밀양, 청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동년 4월 22일 사당의 신주를 받들고 가족과 노복을 거느리고 현의 동쪽 구룡산 아래 물한동으로 피난한 후, 그 자리에서 의병 창의를 도모하였다 했다. 
 《성재선생실기》에 의하면, 물한동으로 임시 거처를 정한 선생은 열흘 동안 자신이 홀로 결심한 창의계획을 가솔과 함께 피난 온 향리 선비들에게 밝히고, 동년 5월 2일 드디어 함께한 가솔과 수십 인의 피난민을 설득하여 사방에 통문(通文)을 띄워 뜻있는 인사들을 불러 모으게 되었다 하였으며, 선생에게는 선영이 자리한 물한동이 지난 3년간 부모의 시묘(侍墓)를 통해 가장 안전한 요새로 확인함에 따라 사당의 신주와 자인향교 공자위판의 이치장소로 물한동을 선택하게 되었다 한다.
  선생의 의병창의 최종 결심은 자인현역의 건장한 장정 김홍, 유인춘, 박영성 등 5~6명이 통문을 받고 찾아와 충의를 다짐함으로 가능하였고, 그날로 구룡산 준령의 높은 봉우리에 올라 제단을 설치하고, 깃대를 세워 하늘에 맹세하니 모두가 선생을 의병장으로 추대하였고, 연이어 무예에 출중한 현역의 이상(李祥)이 스스로 모병한 수십 명이 물한동에 도착하여 의기상투하였고, 이후 그의 설득을 따른 장정이 수천에 달했다 하였다.
  선생은 임란 직전부터 자신의 예지로 미리 준비한 병기를 각자 재능에 따라 나누어 주고, 전 병력을 좌우 2대로 편성, 김홍(金弘)을 우대장으로, 유인춘(柳仁春)을 좌대장으로 삼고, 선봉대장에 박영성(朴永晟), 후원대장에 권삼로(權三老), 총대장에 이상(李祥)으로 삼아 병력 수백 명을 각 요해지로 매복시키고 초소를 만들어 적의 동정을 살피며 길을 막고 추격하니, 감히 적들을 자인경계를 넘지 못하여 전쟁 중에도 농민들이 동요하지 않고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했다.
  동 기록에는 선생은 군량미를 별도 확보하지 않고, 선생의 자인 울곡리(현 울옥리) 곡식창고를 적들에게 빼앗길까 우려하여 곡식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고 빈 창고를 불태워 버렸다 하였다. 여기에서 안전한 곳은 곧 물한동으로, 이때 자신의 창고에서 이적한 곡식은 전량 군량미로 활용하였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자인현역 의병장으로 동년 5월 11일 오목천 일대에 왜구가 침입하여 양민을 죽이고 노략질을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총대장 이상과 돌격대를 보내 순식간에 적 수십 명을 참획하여 물리쳤다. 이때 경산, 하양, 청도에서 의병을 일으켜 서로 공조하였다.
  동년 5월 16일 적의 잔병이 청도를 중심으로 침입, 자인현역을 노략질하였는데, 선생이 직접 의병을 이끌고 추격하여 수백 명의 적을 참획하고, 병기 수백 점을 탈취하였다. 이때 청도 의병장 박경전이 합세를 요청하므로, 청도와 자인은 인접지역이니 마땅히 그대의 뜻에 동의한다 하였고, 5월 20일 정예군사 2천여 명을 거느리고 청도 박경전 의병장과 합세, 적 수백을 참획하고 조총 1백 점과 탄환 십여 두를 탈취하였다. 하지만 총대장 이상은 삼족대까지 적을 추격하다 목숨을 잃자, 환군하여 총대장을 윤기로 삼고, 청도 의병장 박경진으로부터 다시 지원 요청을 받아 동년 5월 24일 다시 군사를 거느리고 선암전투에 출전하여 5천여 명의 적을 대파하니, 적의 시체가 삼대처럼 무너졌고 살아남은 자 백여 명에 불과하였다 했다. 동월 27일은 가지현 전투에서, 29일은 동곡전투에서, 10월 10일은 경주 아화전투에서 각각 혁혁한 전과를 거두었다.
  동년 6월 22일 병졸 1천여 명을 인솔 방어사 권응수 의병장 진영에 합세하여 영천성 복성을 꾀하였다. 24일 영천성의 공격을 의논, 여러 읍의 병사를 모으니 3천 5백여 명이나 되었다고 하였다. 이에 선생이 영천성 복성우군장을 맡아 분전하여 28일 복성하니 방어사 권응수 의병장이 이번 싸움의 전략은 모두 최의병장의 계획이었다 하고, 선생의 공훈을 높이 평가하였다 했다.
  이로써 조산대부 별제에 제수되었고, 동년 9월 10일에는 병사(兵使) 박진(朴晉)의 상계(上啓)로 장기현감에 제수되었으나, 여러 날 전쟁의 병고로 취임하지 못하였다.    선생은 이후에도 화왕산회맹, 문천회맹, 팔공산회맹에도 참가하여 구국의지를 다졌으나, 병고를 얻어 1599년 8월 4일 울곡(현 울옥리)에서 세상을 마치니, 조정에서 가선대부 한성부 우윤으로 추증하였다.
  1786년 3월 12일 선생의 위패를 모신 사당을 조정의 명으로 이때부터“용계서원(龍溪書院)”이라 칭하였다.
  본 취재진은 이날 한 기획전을 통해 영천성복성 속에 수많은 우리 의병들의 아우성과 구국의지 그리고 스토리텔링을 통해 그날의 최문병 의병장의 호령과 함성을 들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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