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의 안녕과 풍년농사를 기원합니다.

무술년 ‘경산시사직제’시민들의 안녕과 풍년 기원

  • 기사입력 2018.11.06 18:51
  • 기자명 김종국 기자

  경산시민의 안녕과 풍년농사를 기원하는 “경산시사직제”가 지난달 12일 오전 10시 30분 삼성현역사문화공원 내에 새롭게 조성되는 사직단(社稷壇)에서 봉행됐다.
  이날 행사는 경산시유림연합회(회장 손석호)가 주관한 가운데 2014년 이후 4년 만에 봉행되었다. 이 자리에는 최영조 경산시장을 비롯한 지역 유림, 공무원, 시민 등 150여명이 참여했다.

▲ 남산면 인흥리 250번지 일대에서 봉행된 2018년 경산시사직제
▲ 남산면 인흥리 250번지 일대에서 봉행된 2018년 경산시사직제

  이 자리에서 손석호 경산유림연합회장은 “경산시 사직제는 지난 1985년부터 시작되었으나, 그동안 장소문제로 떠돌아 지내 온지 30년이라는 세월이 지나쳤다.”하며, “이제 이 자리에 지역 실정에 맞는 사직단이 조성되고 있어 종파를 떠나 누구나 진솔하게 경산 발전과 번영을 기원할 수 있게 됐다.”고 설명했다.
  경산시는 그간 여러 장소를 물색하다 최종적으로 관내 남산면 인흥리 250번지(삼성현역사공원 옆) 일대에 사직공원을 조성하기로 결정하고 금년부터 총사업비 5억원을 투입해 2019년까지 조성을 목표로 사직단 제단과 홍살문(4개소), 신실, 환복실 등을 갖추게 되며, 이밖에도 주변 진입로 개설과 환경정비 사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본래 경산지역에는 3개 군현에 각각 사직단이 설치되었고, 이는 부군폐합 이전까지만도 단의 흔적이 남아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경산시의 경우 경산현읍지(1899년) 사묘(祠廟)편에 사직단의 소재를‘在縣西七里’이라 하였고, 하양현의 경우도 하양읍지 단묘(壇廟)편에 사직단의 위치를‘在縣西三里’라 하였으며, 자인현 또한 읍지 단묘편에 사직단의 위치를 在縣西三里라 하였다.
  손석호 경산시유림연합회장은, 지금까지 경산시는 경산현읍지의 기록에만 의존한 체, 경산군의 고산면이 대구시에 편입되면서 고산면 노변동에 소재한 사직단 터가 대구광역시로 편입되면서 경산시 서부1동 소재 성암산 충헌탑 북편 어귀에 단을 가설하고, 매 경산시민의 날 직전에 사직제를 봉행하였으나, 이 또한 사정이 여의치 못하여 경산향교 경내 가설제단을 활용한바 있으나, 이런저런 사연으로 중단된 후, 4년 여 만에 이날 남산면 인흥리 250번지 일대에 조성 중인 신설 사직단 공사현장에 축조된 제단에서 봉행하게 되었다고 설명하였다.
  국립민속박물관 자료에 의하면, 사직제(社稷祭)는 나라에 질병이나 흉작과 같은 환난이 없도록 조정이나 지방에서 땅의 신인 ‘사(社)’와 오곡의 신인 ‘직(稷)’에게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기원하는 제례로서 지역민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제례는 삼국 시대부터 열려 왔다. 사직제는 민과 관, 종파를 초월한 화합의 행사이다. 국난 극복의 의지를 표현하고, 한민족의 원초적인 민족 신앙 사상을 발현하고자 하는 것으로, 민생 문제를 해결하려는 관의 봉사적 태도를 집약적으로 보여 준다. 현재에는 민족 고유의 전통 제례 의식을 보존·전승하고자 하는 의미도 담겨져 있다(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2018년 경산시 사직제에 대거 참여한 경산시 유림
▲ 2018년 경산시 사직제에 대거 참여한 경산시 유림

  본 자료에 의하면, 사직제는 정기적인 제사와 부정기적인 제사로 구분되며, 정기적인 제사는 중춘(仲春: 음력 2월), 중추(仲秋: 음력 8월), 납일[臘日: 동지 뒤 셋째 미일(未日)]에 시행되고, 이때는 제사의 규모가 가장 큰 대제(大祭)로 시행하였다. 부정기적인 제사는 기우(祈雨)나 기청(祈晴) 또는 치병(治病)을 위한 기고제(祈告祭)와 책봉(冊封), 관혼(冠婚), 출병(出兵) 같은 국가의 큰 일이 있을 때 시행하는 고유제(告由祭) 형태이다.
  또한 사직의 용례는 『주례(周禮)』, 『예기(禮記)』, 『맹자(孟子)』 같은 선진(先秦)시대의 경전에서 찾아 볼 수 있으며, 고대 국가에서 사직의 용례는 『삼국사기(三國史記)』 권13 「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에 1세기 초인 유리왕대에 처음 나타나고, 신라에서는 제37대 선덕왕대에 사직단이 세워졌다고 기록을 찾아 볼 수 있으나, 당시 사직제가 어떠한 형태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고려시대에는 의종 때 최윤의(崔允儀)의 『상정고금례(詳定古今禮)』 에 기반을 두었고, 이후 이를 정리한 『고려사』, 「예지」 길례조에 이를 수록함으로 『고려사』에는 사직제를 큰 제사인 대사(大祀)로 규정하였으며, 의식은 섭행을 전제로 한 사직의(社稷儀) 단 한 개만 존치했다 하였고, 제의(祭儀)는 『개원례』의 내용을 바탕으로 했는데, 태위(太尉)를 초헌관, 태상경(太常卿)을 아헌관, 광록경(光祿卿)을 종헌관으로 각각 규정했으며, 국왕은 빠져 있는 것이 이례적이다.
  조선왕조는 환구와 종묘를 양축으로 삼는 고려시대의 제사 체계와는 달리, 조선시대의 국가 제사는 크게 종묘(영녕전 포함)를 중심으로 한 제사의 범주와 사직을 비롯해 선농(先農), 선잠(先蠶), 풍운뇌우(風雲雷雨), 악해독(嶽海瀆) 같은 농사와 관련된 신들의 범주가 양립하였는데, 사직은 후자에서 가장 중요한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사직제에는 기존의 대제와 기고 외에 기곡(祈穀)이 새로 추가되었으며, 원래 기곡제는 만물이 소생하는 1월에 환구에서 하늘에 대한 제사로 시행되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최초의 기곡제는 중종 34년(1538) 흉년 뒤에는 기곡한다는 명분으로 선농(先農)에서 시행되었고, 광해군 8년(1616)에는 국왕이 선농에서 친경(親耕)을 하며 기곡제를 거행하였다. 그러나 숙종 21년(1694)에는 『예기』의 “맹춘(孟春)에 상제(上帝)께 기곡한다.”라는 구절을 근거로 정월에 사직에서 기곡제를 행하도록 정했고, 다음해 숙종은 직접 사직에서 기곡제를 시행하였다. 이어서 그 다음해에는 기곡제를 상시적인 행사로 법제화함으로 이후 사직에서의 기곡제는 정기적으로 시행되었으며, 그 규정은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에 기재되었는데, 그 등급은 대사(大祀)로 하였다.
  전술한바와 같이 사직제는 토지신과 곡식신을 대상으로 한 국가의 제사로, 전근대의 산업에서 농업의 비중은 절대적이었고, 농민 생활의 안정은 왕조 통치의 기본 바탕이었던 것이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성리학적 왕도 정치를 구현하면서 민생(民生)의 안정을 사직제의 상징성에서 찾음으로써 그 중요성은 더욱더 강조되었다. 조선시대 종묘와 사직의 제사는 가장 중요한 국가 제사였지만, 종묘가 왕통(王統)의 정통성을 강조하는 입장에서 중시되었다면, 사직은 농민 생활의 안정을 추구했던 치자들의 의식이 의례화된 것으로 흔히 국가를 지칭할 때 종묘보다는 사직을 언급했던 것은 백성이 국가의 근간이고 농업이 안정되어야 국가가 유지될 수 있다는 농본의 중요성을 강조한 당대인들의 관념을 드러낸 것이기도 하다.
  이제 경산시도 인구 30만대를 앞두고 시민들의 안녕과 농민들의 풍년 농사를 기원하는 대제를 이 지방의 전통 민속의례로 전승 보존함은 당연하다 아니할 수 없다. 이를테면 사직단이 어느 곳에 있던 중요한 것은 시민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결집된 시민 의식과 우리문화를 소중히 후손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대승적 참여가 무엇보다 필요할 때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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