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해본 경산의 삼성현 이해

  • 기사입력 2018.12.04 17:52
  • 기자명 김종국 기자

  이번 호부터 전승되는 경산의 삼성현에 대한 문헌기록을 중심으로 삼성현의 출현과 중요행적, 사상 등을 고구하고, 이로써 경산사에 미친 영향 등을 구비문학적 해법으로 되짚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제1편] 동방의 새벽 화쟁국사 원효
  1) 탄생과 구도(求道)
  신라와 백제가 서로 밀고 당기는 혈전이 지속되는 위기의 상황 속에 17세의 화랑 김유신이 중악의 석굴에서 삼국통일의 비법을 터득하기 위하여 천일 동안 눈물로 천지신명에게 간청하던 즈음, 후일 이 땅에 민중불교를 주창, 신라호국불교의 도량을 이룩한 거승 원효가 태어났다.
  원효는 신라 제26대 진평왕 39년(617년)에 내마(乃麻?乃末) 담날(談捺)의 아들로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에서 태어났다. 원효의 성은 설(薛)씨이고, 이름은 서당(誓幢)이며, 시호는 화정(和靜), 원효(元曉)는 그의 호다. 
  원효의 조부는 잉피공(仍皮公) 또는 적대공(赤大公)이라 하였고, 그의 아버지는 담날(談捺)이라 하였으며, 당시 신라의 17관등 중 11관등에 해당하는 내마(乃麻)라는 벼슬의 관리였다.
  원효의 어머니는 유성(流星)이 품속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고 그를 잉태하였다고 한다. 그가 태어난 곳이 압량군(지금의 경산시)의 남불지촌(南佛地村) 또는 발지촌(發智村)의 북쪽 율곡하(栗谷下)라 하였는데, 이 불지촌이란 곧 부처님의 땅을 의미하며, 발지촌은 지혜가 뛰어난 마을이란 뜻으로 이는 후일 원효대사와 같은 위대한 스님이 이 고장에 태어났음을 추앙하기 위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보여 진다.
  그가 태어난 곳이 이곳 율곡(栗谷)의 밤나무 밑이라 하는데, 만삭이 된 원효의 어머니가 아버지(談捺)의 부축을 받으며 친정(혹은 出行)으로 해산 준비하러 이 밤나무 밑을 지나다가 홀연히 분만하고 창황 중에 집에 돌아오지 못하고 우선 남편의 옷을 나무에 걸어놓고 그 속을 산실로 하였다.
  이때 오색구름이 소용돌이처럼 산실을 휘감고 차츰 사방으로 번져 어느덧 밤나무 골짜기를 꽉 메웠고, 그것은 마치 무지개가 온 누리를 휘감은 듯 아름다운 광경이었다고 한다.
  원효가 태어난 율곡(栗谷)의 밤나무, 즉 사라수(裟羅樹)에는 밤 한 톨이 발우에 가득 찰 정도로 컸다고 한다.《삼국유사》〈원효불기조(元曉不羈條)〉에는,

  예로부터 전하기를 옛적 사라사의 주지가 절의 종 한사람에게 하루 저녁에 끼니로 밤 두 개씩을 주었는데 종이 관가에 소송을 제기했다. 이상하게 생각한 관리가 그 밤을 가져와 조사해보니 밤 하나가 바루 하나에 가득 찼다. 이에 도리어 한 개씩만 주라고 결정을 내렸다.

  이러한 기록은 곧 유별나게 컸던 사라율이 원효의 출생과 더불어 이루어졌으며, 이는 당시 배고픈 대중에게 은혜를 베푸는 원효의 위대함을 일깨워주는 설화로 보여 지고, 이러한 설화와 함께 이 땅에 태어난 원효는 그의 어머니 태몽과 같이 지상에 내려온 큰 별이었다.
  어릴 때부터 누구보다도 영리했던 설서당[원효]은 마음씨도 곱고, 글공부도 뛰어나 불지촌의 자랑이 되기도 했는데, 그가 여기서 누구에게 글공부를 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고, 다만 태어날 때부터 총명하여 스승을 따라 배우지 않았다고 하는 기록들을 미루어 보아, 설서당이 글공부를 시작한 것은 대략 할아버지 잉피공(仍皮公) 또는 아버지[談捺]밑에서였을 것으로 보여 진다.
  성사(聖師) 원효에 대한 기록은 여럿 있지만, 모두가 일연(一然)이 적은 《삼국유사를 근거로 옮긴 것이라, 그의 소년기로부터 청년기의 모습은 소략하다.
 《송고승전(宋高僧傳)》의 기록에 의하면, 지학지년(志學之年)인 15세가 되면 상투를 하고 관을 쓰게 되며, 이때가 곧 관채지년에 해당되는 것으로, 당시 원효는 초채지년(艸菜之年)에 이르러 불문에 입문했다고 하였으니 그는 15세에 출가한 셈이 된다고 설명하였다. 그러나 그가 무슨 계기로 출가를 결정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 원효가 태어난 사라수(제석사 벽화)
▲ 원효가 태어난 사라수(제석사 벽화)

  지역 설화에는 원효의 조부인 잉피공(仍皮公)이 손자인 서당[元曉]를 가르치면서 항상 『서당』이 김유신 대장군과 같은 훌륭한 장수가 되기를 원했다고 한다. 서당[원효]도 조부의 가르침을 저버릴 수가 없어 신라 화랑에 입문하였다 하나 이에 대한 기록은 찾아 볼 수 없다.
  그의 나이 35세에 당나라 구도길에 오른 원효는 환국 후 그는 스스로 원효(元曉)란 이름을 짓고, 또 그가 살던 집은 헐어 초개사(初開寺)라 하고, 그가 태어날 때 산실이 되었던 율곡 사라수(裟羅樹)곁에다 절을 지어 사라사(裟羅寺)라고 했다.

그가 태어난 마을 이름은 불지촌이라 하고, 절 이름을 초개사라 한 후 스스로 원효(元曉)라 일컬은 것은 모두 불일초휘(佛日初煇)의 뜻이다. 원효란 말 또한 방언이다. 당시의 사람은 모두 향언으로 새벽(始旦)이라 했다.

  하지만 원효가 처음 어디에서 머리를 깎았는지, 계를 준 스승이 누구인지는 알려지지 않으며, 또 그의 젊은 시절 수행에 몰두했던 사찰도 알 수 없다. 다만 그의 젊은 시절은 왕경에만 맴돌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에는,

높은 산 험한 바위는 지혜로운 이 살 곳이요, 푸른 소나무 깊은 골은 수행자가 있을 곳이다. 배고프면 나무 열매를 씹어 주린 창자를 위로하고 목마르면 흐르는 물 마셔 그 갈증을 푼다.

  이처럼 원효는 수행자가 거처할 곳은 고요한 산 속이라 했다. 들리는 것이라고는 염불하는 메아리 소리며 새소리뿐, 인적이 끊어진 한가로운 산 속이야말로 참으로 적당한 수도처라는 것이다.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서도 “수행자는 고요한곳에 한가롭게 머물러야 한다.”고 했다.
 원효는 그 고요한 곳이란 산림(山林)을 말하는 것이라 하면서, 만약 마을에 머물면 소란이 뒤따르게 마련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2) 불기(不羈)와 오도(吾道)
  원효가 포항 운제산에서 잠시 저술에 몰두하였던 적이 있다. 그때 동쪽 항사사(恒沙寺)에는 만년의 혜공(惠空)스님이 주석하고 있었는데, 혜공은 당시 신라사회에 명성이 자자했던 고승이었고, 원효가 혜공승을 만났을 때에는 노승이었다고 한다. 혜공은 원효에 비해 한 세대 앞선 고승으로 원효의 수학에 많은 도움을 주었던 승려 중의 한사람이었다. 
  혜공은 원효에게 무애행(無?行)을 통해 대중교화에 많은 감화를 주었던 당대에 뛰어났던 고승이었다고 한다. 또한 원효는 대안(大安)이란 스님을 만나 인연하면서 시중의 대중을 교화하는 실천 행의 불교를 전격적으로 전파하기에 이른다.
  서기 650년(진덕여왕 4년) 원효가 의상과 더불어 입당구법(入唐求法)을 시도하였는데, <삼국유사>중의 의상록(義湘錄)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중국으로 가서 부처님 교화를 보려하여 마침내 원효와 함께 요동으로 갔다가  변방의 순라군이 정탐자로 잡아 가둔지 수십일 만에 간신히 빠져 나와 돌아왔다.
  이렇게 하여 두 사람의 당나라 행은 무산되고 말았다. 원효는 당나라의 구법행에 실패하자 고향 경산으로 돌아와 그의 본가인 초개사의 주지가 되었고, 얼마 후 팔공산 깊숙한 곳이 그의 수도처가 되었다.
  팔공산에서 의상과 함께 수도생활을 하였던 원효는 문무왕 원년(서기 661년), 당시 45세의 나이로 다시 당나라 구법의 길을 시도하게 되는데, 이 구법행이 원효에게는 대오(大悟)의 기회가 되었던 것이다.
  원효는 의상과 함께 신라의 해문(海門)이자 당과의 경계지점에 도착하여 배를 구하여 창파를 건너려고 했는데, 중도에서 심한 폭우를 만나 이에 길옆에 토감(土龕)사이에 몸을 숨겨 회오리바람과 습기를 피했는데, 다음날 날이 밝아 바라보니 그곳은 해골이 있는 옛 무덤이었다고 한다.
  하늘에서는 궂은비가 계속 내리고, 땅은 질척해서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갈 수가 없었고, 또 연도의 벽 중에 머물렀는데, 밤이 깊기 전에 갑자기 귀신이 나타나 놀라게 하였다는데, 여기서 원효는 탄식하며 당나라 구법의 길을 포기하였다.
  전 날 밤에는 토굴에서 잤음에 편안하더니 오늘밤은 귀신 굴에 의탁함에 근심이 많구나. 알겠도다. 마음이 생김에 갖가지 것들이 생겨나고 마음이 사라지면 토감과 고분이 둘이 아닌 것을, 또한 삼계(三界)는 오직 한마음이요 만법(萬法)이 오직 인식임을 마음밖에 법이 없으니, 어찌 따로 구하랴! 나는 당나라로 들어가지 않겠소.

  그가 다시 돌아온 곳은 신라(新羅)였다.
  앞에서 인용한 《송고승전》에는 원효가 오도할 수 있었던 계기를 옛 무덤 속에서 귀신이 나타나 놀라게 했기 때문이라 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원효가 해골에 고인 물을 마신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하는데, 간밤에 자신이 소지한 조롱박 속의 물인 줄 알고 마신 물이 다음날 날이 밝아서 보니 그것은 해골이었다고 《임간록》에 기록하였고, 그래서 갑자기 깨우치고 탄식하였다고 하였는데 동《임간록》은 원효가 당나라에까지 들어갔던 것으로, 그리고 그곳에서 성도한 뒤 신라로 돌아왔다는 기록 등으로 보아 《임간록》의 기록은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원효의 성도(聖道) 장소가 옛 무덤 속이었다는 것은 두 기록이 서로 일치하지만 원효가 성도할 수 있었던 직접적인 계기와 경험은 서로 다르게 설명되고 있다.
  즉, 《송고승전》에서는 고분은 단순히 토굴인 줄로만 알고 있을 때는 편안하게 잠잘 수 있었는데, 그곳이 실제로는 불안을 경험했다고 한다.
  그러나《임간록》에서는 간밤에 샘물인 줄만 알고 마셨던 물은 달고 시원했는데 그 물이 해골에 고여 있던 물이란 것을 눈으로 본 다음날 오히려 토할 것만 같았던 경험을 했다는 기록 등은 원효의 대오에 걸맞지 않는 것으로 《송고승전》의 기록보다 합리적이지 못한 것으로 보이며, 다소 윤색함을 느끼게 한다.
  원효의 득도는 이렇게 이루어졌다. 

▲ 원효의 토감(土龕) 체험도(법주사)
▲ 원효의 토감(土龕) 체험도(법주사)

  원효가 오도(吾道) 이전에 즉 당나라의 2차 구도행이 44세였는데, 그 이전 37세경에 그는 신라 왕실의 요석궁의 공주와 인연을 맺음으로써, 『설총』을 낳게 되었고, 그후 그는 스스로 속복을 갈아입고 거리낌 없이 거리를 노닐었다고 하는데, 학자에 따라 원효의 오도에 대하여 여러 설을 주장하고 있지만, 어쩌면 원효가 이와 같은 파격적인 혼인을 통하여 비로소 무애의 경지에까지 이르게 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기도 한다.

  3) 기이(奇異)와 이적(異蹟) 
  원효가 득도한 후 그의 명성은 당시 중국과 불교 발상지인 인도지역까지 뻗쳤다고 하는데,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한 설화로는 원효의 도력으로 중국에 있는 운제사의 스님 1,000여명을 구했다는 이야기다.
  이 설화가 얼마만큼 신빙성이 있는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나 이는 원효가 운제사의 붕괴를 미리 알고 멀리 신라에서 그 절의 많은 스님을 구하기 위해 쟁반을 그쪽으로 던져 모든 스님을 밖으로 유인하였다는 신통력으로 당시 중국으로부터 불교를 전해 받은 신라이지만 신라에도 이처럼 뛰어난 학식과 덕과 도를 겸비한 큰스님이 있었다는 것을 중국인들에게 알려주는 설화로 보여 진다.
  한국불교의 수준에 대해 일찍이 육당 최남선은, <인도불교가 서론 격이면 중국불교는 본론격이고, 한국불교는 결론격이다.>라고 하였다. 이는 곧 세계 불교사에 한국불교의 위치를 나타내는 표현으로 그것은 바로 원효의 회통 불교사상을 대변하는 말이 된다.
 불교사상 최대의 인물로서 인도의 석가와 용수(龍樹), 그리고 신라의 원효로 손꼽는데 원효의 불교사상은 다음과 같은 철학적인 의미가 내포하고 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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