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에 가다] 전 자인향교 전교 천기찬씨 고향 이암(耳巖)

  • 기사입력 2019.04.18 00:28
  • 기자명 김종국 기자
자인향교 천기찬(82)
전 전교(경북 경산시 용성면 이암(耳巖) 출신) 

  이암(耳巖, 귀바위)은 경북 경산시 용성면의 최 동극(東極) 구룡산으로 오르는 송림저수지(2차) 끝자락과 구룡산(九龍山)에서 발원하는 오목천(烏沐川)의 원류와 서로 맞닥뜨려지는 용성면 매남(梅南) 3리의 속명(俗名)이다.
  구룡산은 경산시의 외곽을 마치 성곽처럼 두른 남산면 대왕산, 남천면 선의산, 와촌면 팔공산, 진량읍 금박산 등과 더불어 동서남북으로 경산시와 영천시, 청도군, 대구광역시와 경계한 명산으로, 최 동극에 위치한 구룡산은 좌청룡 우백호의 형국을 갖추고 있으며, 그 내룡(來龍)에 흐르는 청정수가 오목천의 원류(源流)이다.
  예로부터 귀 바우라 불리는 지금의 매남 3리는 매화(梅花)가 만발한 남쪽 산이라는 지명과는 달리, 마을 뒷산을 안산(顔山)이라 하고, 구룡산과 경계한 두 골을‘당골’,‘단학골’이라 하였고, 그 아래 계곡을 중심으로 웃각단(윗마을) 아랫각단(아랫마을)이 형성되었다 하였으며, 큰 계곡 건너편에 250여 년 전에 이 마을에 경주 이씨와 영양(潁陽) 천씨(千氏)가 정착하면서 두 각단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앞산 어귀에 각성바지의 결속을 위해 큰 나무를 심고 당산신을 모셔왔다고 한다.
  이 마을이 8대째 이암(耳巖) 구방골에서 대를 이어 살아온 전 자인향교 전교 천기찬(82)씨의 고향이다.

  천 전 전교는 1975년(당시 37세), 수년간 극심한 한해로 천수답 경작이 어려워지자 평소 부농을 꿈꾸던 그는 호구지책으로 지금의 압량면 강서리 일대에 전답을 일부 마련하여 잠시 고향을 떠나 살게 되었던 것이 팔순에 이르도록 출향(出鄕) 인사가 되고 말았다 한다.
  고향을 떠나온 천기찬씨는 조선 충신 충장공(忠壯公) 화산군(花山君) 사암(思庵) 천만리(千萬里)의 15세손으로, 이때부터 영양 천씨 중앙종친회이사직을 맡으면서 자인향교에 입문, 2002년 경산시유림연합회장(2회), 성균관 전학(典學), 전의(典儀)와 관란서원(觀瀾書院) 원장을 거쳐 2005년 자인향교(慈仁鄕校) 전교(典校)로 취임하였다.
  어린 시절 천전교(전 전교)가 살았던 이암마을은 용성면 송림리에 1926년에 축조되었던 송림지(松林池)와 옛 신라 시대 원효대사에 의하여 창건되었던 것으로 전하는 송림사(松林寺) 폐사지 일대를 지나 구룡산 쪽으로 오솔길을 따라 30여 분 오르막길을 힘겹게 따라서야 다다를 수 있는 오지마을로, 사방 눈앞에 보이는 것은 산이요 다닥다닥 붙은 다랑이 천수답이 50여 가구의 생명줄이었다.
  초등학교 시절은 아침 일찍 등교를 서둘러도 지각이 일수였고, 그나마 산골의 잦은 강우로 계곡물이 늘어날 때면 결석이 비일비재(非一非再)라 하였다고 회고하였다.
 “당시 용성초등학교(국민학교)까지는 빠른 걸음으로 1시간은 넉넉히 걸어야만 했고, 그러니 학교에 도착해도 공부가 제대로 되지 못했지요.”
  그는 45년간 고향 이암(속칭 귀바우)을 떠나 15km 남짓 떨어진 압량면 강서리에 정착하였지만, 한해에 4~5차례 성묘를 위해 고향을 찾았을 뿐, 그가 37년간 살아왔던 고향 마을은 이제 낯선 외부인들이 귀바우 사람이 되어 있다.
  그는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자신의 어린 시절을 잊게 하는 것이라 하며, 더 늙기 전에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이 마을의 지명 유래와 전설 등을 한 권의 책으로 정리하는 것이라 하며, 자신의 머릿속에 희미하게 스쳐 지나가는 잊어버린 지명과 이야기들을 안타까워했다.

▲ 천기찬 전교(전 전교)가 지칭하는 귀바우 형상
▲ 천기찬 전교(전 전교)가 지칭하는 귀바우 형상

 “저기 보이는 마을 뒷산이 안산입니다. 안산은 곧 얼굴 산이지요. 저기를 보세요. 산이 마치 사람의 얼굴 같잖아요. 저 위 꼭대기에는 상투처럼 생겼다 해서 ‘상투봉’이라 합니다. 오른쪽 계곡에 집채보다 큰 2개의 바위 위에 깎아 세운 듯한 절벽에 아스라이 붙어있는 저 바위가 이 마을 지명과 관계한 귀바우랍니다.”하며 길쭉하게 내리뻗은 바위를 두고 귀 형국이라 하여 귀 이(耳)자를 붙여 귀바우(귀모양 바위, 경상도 방언)라 하였다. 실제 이 바위 외에는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귀처럼 길쭉하게 생긴 바위는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 어쩌면 출향인 천전교 눈에 이 마을 지명의 상징물로 등장한 것은 아닌가 싶다.

▲ 사람의 얼굴형국과 같다 하여 붙여졌다는 안산(顔山)
▲ 사람의 얼굴형국과 같다 하여 붙여졌다는 안산(顔山)

  또한, 그는 자신의 생가 앞에서 잠시 옷깃을 여미며, 지난 80성상을 되돌아보듯, 생가 안골을 구방골이라 하였고, 그 상단의 두 개의 계곡을 당골. 단학골이라 하면서, 당골과 단학골에 대한 내력이 도무지 생각나지 않는다 하고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현지 지명유래를 조사한 바로는 당골이란 지명은 ‘당골래’또는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산신제나 동제를 지낸 골짜기란 어원의 변이 양상일 가능성이 대두되고, 단학골은 곧 구룡산의 기를 이 마을에 머물게 하기 위한 풍수적 용어로 ‘단학(斷鶴)’이라 하여 구룡산 정상에서 우측 즉, 백호 자리에 학의 기운을 멈추도록 기원하는 풍수적 비보(裨補)로 붙여진 지명일 가능성도 대두되고 있으나, 노 유림의 기억 속에는 모두가 하얗기만 한다며 눈시울을 적셨다.
  천기찬 전 전교는 중년에 고향을 떠났어도 매년에 빼놓지 않고 찾아오는 곳이 있다. 그곳은 1978년 5월에 마을 어귀 선산 자락에 설치해 놓은 입향조 영민(永敏) 공을 배향하는“穎陽 千氏 ?世祭壇碑”앞이다.
  이 자리는 영양 천씨 이암(耳巖) 출신과 청도 갈현(葛峴)에 정착한 족친들이 매년 10월 둘째 주에 시제를 올리기 때문이다.
 “그 날이면 고향을 떠난 족장(族丈)들이 모처럼 한자리에 모여 옛이야기를 나누면서 위선사(爲先事)를 숙의하지요.”

▲ 영양 천씨 양세제단비 앞에서 제단비 설립 배경을 설명하는 천기찬(82)씨
▲ 영양 천씨 양세제단비 앞에서
제단비 설립 배경을 설명하는 천기찬(82)씨

 “80이 넘어도 고향은 추억입니다. 고향은 언제나 어머니의 품과 같이 언제나 우리를 포근히 감싸주고 있는데, 선영만 남겨두고 타향에 잠시 머물게 되었던 것이 이제는 마치 이방인 같은 느낌입니다.”하며, 지난날을 회고하는 팔순의 노안(老顔)은 주름보다 더 굵게 파인 그리움이 가득하였다.
  어린 시절 동구 밖 개천에서 죽마고우들과 가재 잡던 시절이 주마등처럼 지나치지만, 이제는 모든 것이 마음뿐이라며, 내려오던 길에 문득 멈춰 선 곳이‘기름틀바위’앞이다.
 “저 바위는 마치 기름을 짜는 틀과 같이 생겼다 하여 ‘기름틀바우’라 했지요. 너무나 가난하였던 그 시절에는 우리에게 꿈을 안겨주는 바위이기도 했습니다.”
  그때는 얼마나 춥고 배고픈 시절이었던가, 팔순 노장의 어린 시절 머릿속에 그림은 온통 주린 배와 보릿고개가 전부다. 하지만 그때가 행복했었다고 말하는 그는 지금도 고향을 잊지 못하는 까닭이다.

  그곳에는 8대조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용과 관련된 이야기가 있고, 전설 속에 용이 그들을 지켜준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밖에 등 넘어 용암에서 전승되는 용바위 전설은 지금도 할아버지가 들려주듯 생생하기만 하다 했다.
 

▲ 기름틀바위 앞에 멈춰선 천기찬(82), 동행한 자인면 출신 최용석(75)씨
▲ 기름틀바위 앞에 멈춰선 천기찬(82), 동행한 자인면 출신 최용석(75)씨

 “장재 마을 앞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세천(細川)에서 이른 새벽에 동해의 용이 승천하려 할 때, 때마침 그 아래 왼 처녀가 월경대를 빨고 있었는데, 이를 보고 놀란 용이 그만 바위에 들이박고 죽고 말았다 합니다.”
  마치 옛날이야기를 하듯 줄줄 풀어내는 실타래처럼 걸림 없는 그의 이야기 속에는 경산의 명산 구룡산 전설과 같이 그 이야기 속에서 대대로 이 땅을 지키며 살아온 이암(耳巖)과 용암(龍巖) 사람들의 고향 사랑과 사람을 사랑하는 풋풋한 정이 있다.
천기찬씨의 고향“귀바우”는, 굵게 패인 그의 주름만큼이나 그가 잊지 못하고 감춰진 이야기가 있다. 그것은 어쩌면 양매(陽梅) 천기찬(千基燦)씨가 살아온 이유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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