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산 와촌면 소월리 유적서 사람 얼굴 모양 토기 출토

  • 기사입력 2019.12.12 13:19
  • 최종수정 2019.12.13 11:07
  • 기자명 김도경 기자
▲ 지름 1.6m 가량 원형인 구덩이에서 수습된 투각인면문옹형토기 등 출토
▲ 지름 1.6m 가량 원형인 구덩이에서 수습된 투각인면문옹형토기 등 출토

  경산지식산업단지 조성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와촌면 소월리에서 5세기 경 유적으로 추정되는사람 얼굴모양의 토기가 출토됐다.

  문화재청(청장 정재숙)은 지난 4일 경산지식산업지구 진입도로구간의 경산 와촌면 소월리 유적에서 5세기경에 만들어진 사람 얼굴 모양의 토기(투각인면문옹형토기)가 출토됐다고 발표했다. 이 토기 유물은 삼면에 돌아가며 사람 얼굴 모양이 투각으로 표현된 것으로, 지금까지 진주 중천리유적, 함평 금산리 방대형고분 등 타 지역에서 발견된 한 면에 얼굴 모양으로 투각된 토기가 출토되었던 사례와는 차별성이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고 한다.

  소월리 유적은 금호강의 지류인 청통천 주변에 형성된 넓은 평야를 조망할 수 있는 나지막한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 지금까지 발굴조사를 통해 삼국∼통일신라 시대의 고상건물지(高床建物址)와 구덩이(수혈), 토기가마를 비롯하여 고려∼조선 시대의 무덤 등 많은 수의 유구가 확인됐다.

▲ 사람 얼굴모양 토기
▲ 사람 얼굴모양 토기

  바닥을 제거한 시루 1점과 함께 출토된 얼굴 모양의 이 토기는 높이가 28㎝가량으로, 토기의 윗부분 중앙에는 원통형으로 낮게 돌출된 구멍을 뚫었다. 토기 옆면에는 같은 간격으로 원형 구멍을 뚫어 귀를 표현했고, 각 구멍 사이에 만들어진 세 개의 면에 무표정한 듯, 심각한 듯, 말을 하는 듯한 표정으로 조금씩 다르게 표현한 얼굴 무늬를 각각 새겼다.

  각 인면문의 두 눈과 입은 기다란 타원형으로 밖에서 오려내었으며, 콧구멍에 해당하는 2개의 작은 구멍은 안에서 밖으로 찔러 만들었다. 콧등을 중심으로 양쪽을 살짝 눌러서 콧등을 도드라지게 표현하였다. 옹형토기와 함께 출토된 시루의 몸통 중간 지점에는 소뿔모양 손잡이 2개가 부착돼 있다. 두 점의 토기는 서로 결합돼 사용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토기의 제작 기법과 특징 등으로 보면 5세기 전반 또는 그 이전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일상적인 목적보다는 5세기경 유적에서 베풀어진 일종의 의례 행위와 관련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유적의 중심을 이루는 주변의 고상건물지도 당시의 의례와 관련된 시설의 일부였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토지관리 관련된 목간도 출토
  - 사람 얼굴 모양 토기 아래서 발견
  같은 소월리 유적에서 사람 얼굴 모양의 토기에 이어 6세기 대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토지관리 문서 목간이 추가로 발견되어 한국고대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로 평가 확인되었다. 

  길이가 74.2㎝에 이르는 이 목간은 사람 얼굴 모양 토기의 아래에서 출토되었으며,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 수습 및 응급보존처리 등을 진행하고 있다. 지난 6일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 진행한 1차 판독을 통해 굽은 나무의 표면을 다듬어 만든 총 6면에 걸쳐 약 94자의 글자가 있는 것으로 밝혀졌으며, 이 중 2면은 글자를 연습한 흔적으로 추정하고 있다. 기록된 글자의 서체나 내용으로 보아 오늘날 경상북도 경산 인근 지역의 토지 현황을 기록한‘6세기대에 작성된 토지관리 문서 목간’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목간에 기록된 글자 가운데‘곡(谷)과 답(畓), 제(堤)’등이 주목된다. 이번에 발견된 목간을 통해 골짜기(곡, 谷)를 배경으로 형성된 일정한 집단이 있었으며, 둑(제, 堤)이 조세 부과와 연관 있다는 점도 드러났다. 이를 통해 골짜기(谷)와 둑(堤)을 중심으로 한 당시 지방 촌락의 입지, 농업 생산력 증대를 위해 축조한 제방과 그 주변에 자리하고 있는 논의 존재 그리고 그곳을 대상으로 조세를 수취하는 중앙 정부의 지배 양상을 동시에 엿볼 수 있게 되었다.

  논을 의미하는 표현으로 우리 고유의 한자(漢字)인 답(畓)을 사용했다는 점과 이 밖에 조세 부과를 위한 토지 면적 단위는 결(結)이나 부(負)를 사용했다는 점도 밝혀졌다. 삼국시대의 1결은 대략 15,400㎡로 추정되며 1부는 대략 154㎡로, 100부가 1결이다.

  우리나라 고유의 한자인 답(畓)은 종래에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국보 제33호, 561년 건립)에 처음 등장한다고 여겨졌는데, 목간에 등장하는 답(畓)을 통해 목간의 제작연대도 비슷한 시기임을 추정할 수 있다. 토지 면적 단위인 결(結)과 부(負)는 지금까지 삼국통일 이후 사용된 것으로 여겨졌지만 이번에 발견된 목간을 통해 그 사용 시기를 6세기까지 올려볼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당시 신라의 지방 지배와 토지를 중심으로 한 경제활동 논의를 진전시킬 수 있는 중요한 자료를 확보했다는 점에서 이번에 출토된 목간은 한국고대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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