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의 바른 이해 - 원효의 파계와 입당 구도의 진정성을 논한다.

《삼국유사》〈원효불기〉에 수록된 원효의 파계와 입당 구도의 진정성을 모두 3부작에 걸쳐 보다 구체화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 기사입력 2020.10.19 17:50
  • 기자명 김종국 기자

  제1부 원효는 왜 문천교에서 몰가부를 노래했나?

 《삼국유사》권 4, 이해 5,〈원효불기조〉에 의하면, 원효가 저잣거리에서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괴상한 노래를 지어 불렀다 하였다.
  당시 이를 찬술한 일연(一然)은 향전(鄕傳)을 인용하였다 하지만, 여기에는 상당한 미스터리가 없지 않다.
  먼저 몰가부를 소개하는 첫머리에 원효가 하루는 풍전(風顚)하여 거리에서“誰許沒柯斧 我斫支天柱”라 소리치며 다녔다 하였다.
  이 시기에 원효는 의상과 의기투합하여 일차 당나라에 구법길을 떠났다 수나라 국경수비대에 간첩으로 오인당하고 1주일이나 억류된 후 풀러나 환국하였던 서기 651년경이다. 이 시기에 신라 정국은 잦은 백제국의 침입으로 백제와의 전쟁에 지칠 대로 지쳐 있었던 시기이다.
  이 시기에 당나라 구법 길에 오르던 신라의 한 승려가 뜻을 이루지 못하여 환국한 후, 어느 날 느닷없이“내게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주겠느냐, 그러면 내가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세우겠다.”하는 괴이한 노래를 부르고 다닐 수 있냐는 것이다. 특히 그 시점은 선덕여왕이 승하하고, 진덕여왕(재위 647년∼654년)이 재위할 즈음이고, 이후 태종 무열왕(재위 654∼661)이 등극 3년을 앞둔 시기로, 원효의 세납은 34세였던 시기다.
  어떠한 연유이던 비록 6두품 출신이지만, 황룡사와 분황사 서고에서 수많은 서책을 두루 섭렵한 명망 높은 승려가 느닷없이‘네가 과부를 얻어 아들을 낳겠다’하는 노래를 지어 불렀다는 기록은 그것이 비록 향전(鄕傳)이라 하더라도 상식 밖이라 아니할 수 없다.
  물론 본 기록에는 원효의 행각을 풍전(風顚)이라 기록하였지만, 당대에 주목받든 승려가 어느 날‘바람났다.’,‘상례를 벗어난 행동’을 하였다는 점은 당시 정치적 상황을 미루어 보아 신라조정에서 과연 이를 방관할 수 있었겠느냐 하는 부정적인 시각은 꼬리를 물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필자의 주장에는 왜 하필이면 신라가 위기에 처해 있을 그 무렵인가 하는 데서 이를 동《삼국유사》를 통하여 재론하고자 한다.
  동 기록에 의하면, 원효의 파계 동기는 귀책사유가 당연히 원효에게 있다는 것이며, 이의 행각을 오로지 태종 무열왕만이 이해하고 수용했다는 점이 된다.
  하지만, 소상하지는 않지만,《삼국사기》권제 46 열전 제6 설총편에 기록은 이와 또 다른 다음과 같은 양면성이 있다.

 “薛聰 祖談捺奈麻 父元曉 初爲桑門 掩該佛書 旣而返本 自號小性居士”

  원효는 처음에 상문(桑門-沙門)이 되어 불서에 널리 통달하였고, 얼마 후에 본색(本色)으로 돌아와 소성거사(小性居士)라 자호(自號)하였다 했다. 여기서 상문(桑門)이란 출가를 의미하고, 본색(本色)이란 본래의 모습으로, 이는 태어나면서부터 부처인 인간의 그 본래 모습이란 뜻으로 해석된다.
  이같이《삼국사기》에는 원효에 파계 부분은 일체 언급한 바를 찾아볼 수 없고, 다만 설총의 부라 명기하였을 뿐이다.
  이에 대하여, 동《삼국유사》기록을 근거로 사건의 발생 및 전개 시기를 유추하면, 이는 651년 환국하여 3년 이후인 645년, 즉 태종 무열왕 등극 원년(元年)인 셈이 된다.
  이 시기는 원효의 세납이 37세가 되는 해로, 그간 환국 후 일정한 사찰 없이 남산에 몸을 숨기고 여러 정황으로 보아“발심수행장”과“법화경종요”를 집필하였던 시기로 유추되나 확실하지는 않다.
  이때 어느 날 저잣거리에 나돌며 몰가부란 노래를 불렀고, 그것도 노골적으로 자루 빠진 도끼, 즉, 주인 없는 과부를 대상으로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깎겠노라 하였다.
  여기에서 필자는 왜 하필이면 자루 빠진 도끼를 택했는가에 대하여 간과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 노랫말은 신라 장안에 그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하였던 것을 어떻게 태종 무열왕이“대사가 귀부인을 얻어 현자를 얻고자 하는구나”하며, 단번에 그 뜻을 알고 궁리에게 원효를 요석궁으로 인도하라는 칙명을 내렸을까 하는 향전의 기록은 모종에 미스터리를 예고하였다.
  이를 두고 춘원 이광수는 그의 저서“소설 원효대사”에서 원효가 황룡사에서 분황사로 이적하여 출가 사문으로 정진하고 있을 때, 도성의 귀족 부인들이 원효를 만나기 위해 구름같이 몰려들었다 했고, 이에 요석궁 공주 역시 원효를 사모한 나머지 몰래 금란가사를 지어 올리고, 매일 같이 찾아와 원효의 법문을 청했으나, 원효는 태동도 하지 않았다 했다. 하지만, 요석공주는 지난날 백제와의 전투에서 정혼자를 잃고 홀로 요석궁에서 외로운 나날을 보내던 중 훨씬 하게 잘생긴 원효와의 만남은 삶의 활력소가 되었다는 것이다.
  소설에서는 이 같은 요석공주의 처신을 못마땅히 여기어 질책하여보았지만, 이미 공주가 원효에 대한 마음이 도가 넘었으므로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비록 소설로 각색한 픽션(fiction)작이라 할 수 있지만, 앞의《삼국유사》〈원효불기〉조에 나타난 고전을 인용하였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혹자는 이를 두고 사실에 따른 논픽션(nonfiction)작 이라 할 만큼 세인들에게 대중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본 기록의 발상지인 경북 경주시는 사진에서와 같이 지난 2018년에 문천(蚊川)의 월정교(月淨橋)를 복원하고, 그 입구에 복원 안내표지판과 원효 관련 안내판을 세우면서, 그 문안에‘원효와 요석의 사랑’이란 내용으로 문천의 유교(楡橋)와 발굴지를 소개해 두면서 이를《삼국유사》의 원전을 인용하였다는 점이다.
  또한“원효가 다녀간 그 길 위에”란 표지판에는 원효가 저잣거리에서 몰가부(沒柯斧)를 부를 때, 무열왕은 그 의미를 알고 있었다 적어 놓았다.
  중요한 것은 동 유사(遺事)에서,“勅宮吏覓曉引入 宮吏奉勅將求之 已自南山來過蚊川橋 遇之 佯墮水中濕衣袴 吏引師於宮 褫衣曬㫰 因留宿焉”
   즉, 왕이 궁리(宮吏)를 시켜 원효를 찾아 궁으로 데려가라 하니, 궁리가 칙명을 받들고 원효를 찾을 새, 그는 이미 남산에서 내려와 문천(蚊川)을 지나다 만났다 하였다. 이때 원효가 문천교에서 일부러 물에 떨어져 옷을 적시니, 궁리가 원효를 데리고 요석궁에 가서 옷을 갈아 말리고, 거기서 머물게 하였다.”적었다.
  이에 앞서 본전 말미에 “人皆未喩”라 하였다. 이는 곧 원효의 이러한 돌발적인 몰가부 노래에 신라 장안에 모든 이들은 그 노래에 담긴 뜻을 알지 못하였는데 오로지 태종 무열왕만이 그 뜻을 알았다는 점이다.
  이로써 무열왕이 궁리를 시켜 원효를 요석궁으로 인도하라는 칙명을 내렸다는데 이미 원효는 요석궁 앞의 유천을 건너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는 절묘한 시간차가 아닐 수 없다. (다음 호는 저잣거리 무애가가 연재됩니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