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의 바른 이해 _제2부 원효는 왜 저잣거리에서 무애가를 불렀나?

※ 제1부 태종 무열왕 등극 원년 645년을 654년으로 바로잡습니다.

  • 기사입력 2020.11.18 21:25
  • 기자명 김종국 기자

  본고는 지난호에 원효는 왜 문천교에서 몰가부를 노래했나에 이어, 요석궁을 떠난 원효가 문득 까만 모자를 쓰고 속복(俗服)을 갈아입고 저잣거리에 나서 큰 박을 들고 괴상한 춤을 추면서 이상한 노래를 지어 불렀다는데, 이번 호는 당시 그가 추었다는 무애 춤의 진정성에 대하여 짚어보고자 한다.
  ※ 제1부 태종 무열왕 등극 원년 645년을 654년으로 바로잡습니다.

 “까만 고깔모자 쓰고 속복 입은 원효”
  본고는 이 부분 역시 《삼국유사》의 찬자(撰者) 일연(一然)이 〈원효불기〉 편에 향전을 인용하였으나, 이를 두고 송나라 찬녕(贊寧)이 적은 《송고승전》의 〈당신라국황룡사사문 원효〉편에는 당시 원효의 행동거지를 이렇게 적었다.

 “無何發言狂悖, 示跡乖疎. 同居士入酒肆倡家, 若誌公持金刀鐵錫. 或製疏以講雜華, 或撫琴以樂祠宇, 或閭閻寓宿, 或山水坐禪, 任意隨機, 都無定檢”

  여기에 원효는 얼마 안 되어 말하는 것이 사납고, 함부로 하였으며, 행적을 나타냄이 어그러지고 거칠었으니, 거사들과 함께 주막이나 기생집에 드나들었고, 지공(誌公) 법사처럼 금속으로 된 칼이나, 쇠로 된 석장(錫杖)을 가지고 있으면서, 혹은 소(疏)를 지어 잡화[화엄경]를 강론하기도 하고, 혹은 거문고를 어루만지며 사당에서 즐기기도 하였으며, 혹은 여염집에 기숙하기도 하고, 혹은 산이나 강가에서 좌선(坐禪)하기도 하였으니, 마음 내키는 대로 하여 도무지 일정한 법식이 없었다 하였다.
  이는 종잡을 수 없는 기이한 행동거지로 찬술자인 찬녕마저도 찬술(纂述)에 중심을 잡지 못하였다는 표현이다.
 《삼국유사》〈원효불기〉에서도, 기이한 행동은 이와 다를 바 없었다.

 “曉旣失戒生聰, 已後易俗服, 自號小姓居士, 偶得優人舞弄大瓠, 其狀瑰奇, 因其形製爲道具, 以華嚴經一切無㝵人, 一道出生死, 仍作歌流于世”

  원전에 의하면, 원효는 이미 계(戒)를 잃어 총(聰)을 낳은 후로는 속인(俗人)의 옷으로 바꾸어 입고, 스스로 소성거사(小姓居士)라고 이름하였고, 그는 우연히 광대들이 가지고 노는 큰 박을 얻었는데, 그 모양이 괴상했다.
  이로써 원효는 그 모양을 따라서 도구(道具)를 만들어 <화엄경(華嚴經)> 속에 말한,“일체(一切)의 무애인(無㝵人)은 한결같이 죽고 사는 것을 벗어난다.”는 문구(文句)를 따서 이름을 무애(無㝵)라 하고, 계속하여 노래를 지어 세상에 퍼뜨렸다 하였다.

원효 성사의 저잣거리 무애춤[無㝵舞] 가상도(○내 춤추는 원효)
원효 성사의 저잣거리 무애춤[無㝵舞] 가상도(○내 춤추는 원효)

  이는 앞의《송고승전》 기록과 표현양식은 서로 다르다 할 수 있으나, 그 속에 담긴 근본만은 걸림 없다는 뜻으로, 이른바 여기서 원효의 무애(無㝵) 사상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이는 곧 이어지는 동《삼국유사》의 다음과 같은 기록에서 원효의 화쟁 사상을 다음과 같이 엿볼 수 있다.

 “嘗持此 千村萬落且歌且舞, 化詠而歸, 使桑樞瓮牖玃猴之輩, 皆識佛陁之號, 咸作南無 之稱, 曉之化大矣哉”

  이를테면, 어느 날 이 도구를 가지고 수많은 마을에서 노래하고 춤추면서 교화(敎化)시키고 읊다가 돌아오니, 이 때문에 상추옹유(桑枢瓮牖) 확후(玃猴)의 무리들로 하여금 모두 부처의 이름을 알고,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을 부르게 하였으니, 원효(元曉)의 교화야말로 참으로 컸다는 평가로, 이는 곧 원효의 기이한 노래가 민중들에게는 걸림 없는 무애가(無㝵歌)가 되고, 그의 그침 없는 행동은 곧 무애무(無㝵舞)가 되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원효의 걸림 없는 무애행은 곧 가난하게 살아가는 하층계급의 민중들과 무지렁이에 이르기까지 부처의 이름을 익혔다는 것으로, 이는 저잣거리 민중 속에 신라불교의 대승(大乘) 사상이 싹트기 시작하였던 것으로 평가되는 대목이다.
또한, 향전을 인용한《삼국유사》〈원효불기〉의 몰가부와 여기 무애가는 당시 태종 무열왕과 원효 간 모종(某種)의 언약이 실천되는 단계로 볼 수도 있다. 이는 당시의 시대상과 백제와의 전쟁상황을 미루어 볼 때, 원효의 무애춤과 무애가는 신라불교의 대개혁을 암시하는 하나의 메아리와 같은 원효의 아우성이요, 당시 신라의 소승불교에 맞선 대 저항일 수도 있다.
  앞의 원효의 몰가부(沒柯斧)는 그가 세상 앞에서 자신이 파계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상황을 노래하였다면, 여기에 무애가(無㝵歌)는 이전의 몰가부에 대한 소명(召命)을 실천하는 또 다른 진행형이라 볼 수 있다.
  이를테면 몰가부가 스스로 승려로서 계(戒)를 어기면서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굴레라면, 무애가는 스스로 속복(俗服)으로 바꿔 입고“소성거사”,“복성거사”라 자칭하면서 저잣거리 민중 속으로 뛰어들었고, 이로써 신라불교가 나라를 구한다는 호국 사상을 과감히 저잣거리 곳곳에 봉기하게 하였다. 이것이 원효의 일심(一心)이요, 무애(無㝵)요, 화쟁(和諍) 사상이다.
  세상 사람들은 이러는 원효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당시 백제와의 전투에서 지칠 대로 지친 신라 정국에는 원효의 일련의 행각이 실낱같은 희망의 싹이 되었다. 그도 그를 것이 원효가 무애무(無㝵舞)을 통하여 민중들 앞에서 절절하게 외쳤던 무애가(無㝵歌) 속에는 곧 신라를 구하기 위한 나라 사랑의 의지가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나무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만 외치면 된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면 모두가 부처님의 세계인 극락으로 갈 수 있다.”

  이는 무지한 민중들에게 나라 사랑의 의지가 되었고, 이로써 모두 하나 되는 일심(一心) 사상이 그들로부터 싹트게 된 것이다.

  이처럼 원효는 순교적 정신으로 신라를 구하는 대열에 자신을 불태우면서 대승적(大乘的) 차원에서 계율(戒律)에서 벗어났고, 그 굴레를 걸머진 원효는 고깔모자에 속복을 입고 뭇 신라인들 앞에서 춤추고 노래하였고, 또 그들을 위하여 군승(軍僧)으로써 다시 그들 앞에 서게 되었던 것이다.

경주 통일전에 소장된 원효의 군사 자문도
경주 통일전에 소장된 원효의 군사 자문도

  훗날 삼국 간에 전쟁이 모두 끝이 나고 원효는 전국의 전장 터를 두루 섭렵(涉獵)하며 그날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둔 외로운 넋을 위로하고 추선(追善)하였던 그곳에는 무려 100여 개소에 달하는 원효사·원효암이 곳곳에 세워진 것 또한 이와 무관하다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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