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부 원효의 토감 속 오도와 황룡사 백고좌회의 교훈

《삼국유사》의 바른 이해

  • 기사입력 2020.12.13 22:25
  • 기자명 김종국 기자

  지난 호에 원효가 저잣거리에서 불렀던 무애가와 무애춤에 대한 진정성을 짚어보았고, 이번 호는 이를 마무리하는 1~2차에 걸친 입당 구법 시도와 당항성 부근 한 토감(土龕)에서 깨달았던 일체유심(一切唯心), 그리고 신라 백고자회(百高座會)에서 그가 소리쳤던‘서까래와 들보’는 무엇을 의미하나에 대하여 논하고자 한다.

 “어제와 오늘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체유심”
  본고는《삼국유사》권4, 의해5〈의상전교(義相傳敎)〉에 수록된 원효의 1차 입당 구법 시도와 송나라 찬녕(贊寧)의 송고승전(宋高僧傳), 북송의 영명연수(永明延壽)가 찬술한 종경록(宗鏡錄), 그리고 북송의 혜홍각범(慧洪覺範)이 지은 임간록(林間錄)을 일연(一然)이 찬술한《삼국유사》의 기록과 비교 분석하고자 하였다.
  먼저 원효의 1차 입당 구법에 대하여《삼국유사》〈원효 불기〉에는 이를《당고승전》에 의존하였고, 동 유사〈의상전교〉에서는 의상의 청에 의하여 입당(入唐) 중 수나라의 국경수비대에 간첩으로 오인되어 1주일여 구금당한 후 풀려나 환국하였다고 기술하였다.
  이에 대하여 북송(北宋)의 영명연수(永明延壽)가 찬술한《종경록》에는 원효의 1차 구법에 대한 기록은 언급하지 않고, 다만 661년에 다시 시도한 2차 구법행만 다음과 같이 수록하였다.
  (요약)‘원효와 의상 법사가 함께 당나라에 와서 스승을 찾으려 하였다. 그들은 우연히 밤이 들어 노숙하면서 무덤 속에 머물게 되었다. 원효 법사가 목이 말라 물을 찾던 중, 마침 왼편에 물이 고인 것을 보고는 몹시도 달게 그 물을 마셨다. 다음날 원효는 그 물을 확인하였는데, 원래 그것은 시체의 썩은 물이었다. 그러자 마음이 불편해 토하려 하다가 크게 깨닫고 이렇게 말했다.“내 듣기에 부처가 삼계가 유심이고, 만법이 유식(唯識)이라 했다. 좋고 싫은 것은 내게 있으며, 물에 있지 않구나.”하고, 마침내 고국에 돌아가서 지극한 가르침을 널리 베풀었다 하였다.’
  북송의 혜홍각범 승이 찬술한 《임간록》 또한 다음과 같이 앞의 《종경록》과 크게 다를 바는 없다.
  (요약)‘당나라 때 승려 원효가 처음에 배를 타고 와서는 장차 명산에서 도를 찾고자 하였다. 홀로 거친 비탈을 가다가 무덤 사이에서 잠을 잤다. 몹시 목이 말라 손으로 굴속에 있는 물을 움켜쥐고 달고도 시원하게 마셨다. 날이 밝을 무렵에 보게 된 것은 해골이었다. 몹시 싫어하는 마음이 생겨나 모두 토해내고 싶었다. 홀연 깊이 깨달아서 탄식해 말하였다.“마음이 생겨나면 이리저리 법이 생겨나고, 마음이 멸하면 해골이 둘이 아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길 삼계(三界)가 마음에 있다 하셨는데, 어찌 나를 속이셨겠는가?”하며, 마침내 그는 다시 스승을 찾지 않고 그날로 해동(海東)으로 돌아갔다. 그는“화엄경(華嚴經)”을 풀이하고 성불(成佛)하는 가르침을 널리 폈다 하였다.’
  하지만, 앞의《종경록》〈당신라국의상전〉,《임간록》에 표현된 원효의 토감 속의 깨달음은 사뭇 진지하고 적극적이다.
  이를 구체화하면,《송고승전》〈의상전〉에는 원효와 의상의 토감(土龕) 속 경험에 대하여, 본국의 해문(海門)이자 당으로 들어서는 지경에 이르러, 그들은 큰 배를 구하여 거친 바다 물결을 넘으리라 계획하여 길을 가던 중, 갑자기 험한 비를 만나게 되어 길옆의 토감 사이에 몸을 숨겨 습하게 몰아치는 비를 피했다 하였다.
  하지만, 이튿날 새벽에 보니 그곳은 오래된 무덤의 해골 곁이었고, 땅 또한 질퍽한 진흙 길이라 한 걸음도 나아가기 어려웠다. 무덤 앞에 머물면서 길을 나서지 못하였다. 또 그 무덤 굴 벽 가운데 기대어 있었다. 밤은 깊지 않아서 갑자기 귀신이 나타나 놀라기도 하였다. 원효가 탄식하여 말했다.
 “전날에는 무덤을 토감이라 생각하고 잤는데도 편안히 잘 수 있었고, 오늘 밤에는 그곳을 피해 잤는데도 귀신이 넘나드는 변을 당했다. 생각에 따라 갖가지 일이 생기고, 생각을 없애니 토굴이니 무덤이니 하는 구별이 없어진다. 이 세상 모든 것이 다 마음가짐 하나 탓이다. 이 마음 외에 또 무슨 진리가 있으리오. 나는 당으로 건너가지 않겠다.”하고 원효는 짐을 메고 다시 신라로 향해 돌아섰다 하였다.
  하지만, 원효가 비를 피하였던 장소가 곧 토굴이고, 그가 무덤 속에서 목이 말라 해골 속에 담긴 물을 마시고 갈증을 풀었는데, 다음날 그것이 해골 물인 것을 확인하고 나니 구역질이 났다 하였음은 누구에게나 나타날 수 있는 조건반사이다.
  그러나 이미 원효의 깨달음은 눈에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자아(自我)의 본능(本能), 즉 초자아적(超自我的)인 두 개의 마음에서 하나를 발견하였다는 점이다.

  그래서 원효는 그 자리에서 삼계는 유심(三界唯心)이요, 만법은 유식(萬法唯識)이라 하였고, 여기서 원효는 무애(無㝵)와 일심(一心)을 깨닫고, 무애도인(無㝵道人)으로써 스스로 환국을 결심하였다.

  이러한 원효의 깊은 속내는 위 벽화 ①~③과 같이 그곳이 무덤이든, 토감(土龕) 이든 그것마저도 개의(介意)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곧 이타(利他) 구제의 입장에서 널리 인간 전체의 평등과 화쟁(和諍)을 이상으로 삼고, 그것이 불타의 가르침의 참다운 대도(大道)라는 대승적(大乘的) 경지에 이르렀다.
 “100개의 서까래를 구할 때 나는 이 자리에 서지 못했다”

  금강삼매경론과 백고좌회 강론 부문은 삼국유사에는 언급한 바 없지만, 오히려 중국 송나라에서 찬술한《송고승전》에는 이를 보다 구체화하였다.
  신라의 백고좌회(百高座會)는 그 본을 구국(救國)에 두었으나, 갑작스러운 신문왕 왕후가 뇌종양으로 절체절명의 위기에 있을 때, 한 무당의 권고로 사신이 구했다는《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은 책이 모두 흩어진 낱장으로 이를 합철하여 강론할 사람이 없게 되자, 당시 초개사(初開寺)에 수행 중인 원효(元曉)가 천거되었으나, 이전에도 백고좌회에 대덕(大德)들이 모두 나서 참소(讒訴)하여 들지 못하였는데, 이번에는 왕명으로 그 소임이 되었다.
  개인적으로 신라 제31대 신문왕과 숙질 관계이다. 즉, 부왕인 문무왕과 요석궁주와는 형제요, 요석궁주는 신문왕의 고모로, 엄격히 말하면 고모부가 된다.
   당시 원효의 백고좌회 수용은 신라 대덕들에 대한 자신의 권위나 다툼에 앞서 먼저 강력한 왕권과 병으로 고통받는 중생심에 의한 선택으로, 그는 금강삼매경을 통해 하나가 되는 일심 사상을 논하고자 하였다.
《송고승전》원전에서 다음과 같이 왕비의 병을 낫게 하는 데는 용왕이 부한 조건이 있었다.

 “可令大安聖者, 銓次綴縫, 請元曉法師, 造疏講釋之, 夫人疾愈無疑. 假使雪山阿伽陀藥力, 亦不過是”

  그것은 왕비의 병을 낫게 하는 대신 용왕(龍王)은 왕비의 병에 의탁하여 증상연(增上緣)을 삼아, 이 경전을 부쳐서 저 나라에 출현시켜 유포하라는 것과 이에 삼십 장쯤 되는 중첩된 흩어진 경전을 반드시 대안 성자가 전차(銓次) 하여 꿰매게 하고, 이에 원효를 청하여 주석을 지어 강론하라는 것이었다.
  이는 원효에게 그동안 여러 차례 백고좌(百高座) 회에 대덕(大德)들의 참소(讒訴)로 들지 못한 데 대한 굴레를 왕비의 병을 고치는 조건으로 용왕이 원효의 손을 들어 준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 등장하는 용왕 검해(鈐海)의 존재와 그 금강삼매경을 신라 대덕들의 참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원효를 선택하게 종용한 당사자는 당연히 대안(大安) 성자가 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인적 배경은 개인적으로 대안이 원효를 사문(沙門)에 입문하도록 이끌어 준 최초의 스승이요, 또 누구보다 그를 가까이에서 지켜본 인물이기 때문이란 데 있다.
  이러한 대안의 의도에 대하여《송고승전》에는 신문왕이 왕비의 병이 차도 없자 이를 무당(巫堂)에게 청하여 얻은 비법으로 곧 당나라로 사신을 보내어 영약을 구하도록 하였다 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사신이 남쪽 바다[溟漲] 가운데 이르자, 갑자기 한 노인이 나타나서 파도에서 뛰쳐나와 배에 올라서서 사신을 바다로 안내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당나라로 신약을 구하기 위해 뱃길에 오른 신라의 사신을 중도에 마중한 것으로, 여기에는 그 중심에는 대안 성자가 있었음을 시사하는 구절이 된다.
  또한 본문에서 수중 궁전의 장엄함과 화려함 여기에서 용왕(鈐海)과의 만남은 곧 에 왕비의 병으로 위기에 처한 신라국(新羅國)을 구하는데, 호국용이 등장하게 되고, 그 호국용을 검해라 하였음은 바다에 빗장을 꽂아 굳건하게 하겠다는 의미로 해석되며, 또 사신에게 도중에 마사(魔事)를 우려한 나머지 용왕이 칼을 가지고 사신의 종아리를 찢어 그 속에 넣고서 밀랍으로 채웠다는 점은 이 일에 철저한 보완이 필요하였음을 의미한다.
  이는 신라 제30대 문무왕이 승하 후 죽어 해룡(海龍)이 되어 주변국의 간교로부터 신라를 지키겠다는 동해 산골(散骨) 유명(遺命)과 앞에 동해의 호국용 등장과는 신라를 수호하고자 하는 근본적 의미와 별반 다를 바 없다.
  이는 본문에서 왕비를 청제(靑帝)의 딸이란 표현과《금강삼매경》은 곧 굳건한 신라의 반석을 의미하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여기서 대안 성자는 국왕의 흔들림 없는 판단을 위해 다음과 같이 그의 천거에 대하여 원효를 불러 주석을 지어 강론하면 왕비의 병이 치유될 것은 의심한바 없을 것이라[請元曉法師, 造疏講釋之, 夫人疾愈無疑]하며, 다시 한번 쐐기를 박고는 다음과 같이 주문하였다는 것이다.

 “安得經, 排來成八品, 皆合佛意. 安曰, “速將付元曉講. 餘人則否.”

  즉, 빨리 원효에게 가져다주어 강론하게 하라, 다른 사람은 아니 된다고 다시 한번 이를 상기시켰다는 점이 주목된다.
  이에 대하여《송고승전》에는 신문왕이 대안 성자의 청에 일차적으로 차례를 묶은《금강삼매경》을 대덕(大德)에 공개한 후 주석을 청했으나, 아무도 이를 해석하지 못하고, 원효의 참여를 참소(讒疏)하자, 이를 왕명으로 초개사에 기거하는 원효에게 주석을 명했다 하였다.
  이에 원효가 왕명으로《금강삼매경소》를 탈고하였으나, 참소(讒疏) 대덕들의 농간으로 도둑질당하였다 하였다.
  당시 신라불교의 소승불교론자는 자신들이 해내지 못한 일을 원효가 수행할 수 없다고 도모하고, 갖은 방법으로 기간 내 탈고를 무력하게 하는 한편, 급기야는 이를 제삼자에게 훔쳐내게 하여 원효의 강론을 저지하였던 것이라 하였다.
  원효는 자신이 해석한 금강삼매경론을 도난당하자 황당해하며 이를 국왕에게 보고하여 3일간 연장을 받고, 3일간 밤낮으로 원효는 3권의《약소》를 완성하였고, 이에 원효는 준비한 황소의 두 뿔 위에 벼루를 얹고 왕성까지 가는 중, 강론할 약소를 집필하여 백고좌회에 참석하게 되고, 원효가 자리에서“예전에 백 개의 서까래를 고를 때에는 비록 그 모임에 참석하지 못했으나, 오늘 아침 한 개의 들보를 놓는 곳에서는 나만이 할 수 있구나.”라고 하였다. 당시 모든 유명한 고덕들이 얼굴을 숙여 부끄러워하고 진심으로 참회하였다 하였다.

  원효는 이처럼 우리 역사 속에 평생을 무애실천 도인으로, 후대에는 보살로서 붓다의 경지에 이르는 성사임에는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이에 대하여《삼국유사》찬자인 일연선사는〈원효불기〉의 끝 부문에 다음과 같은 찬시를 남겼다.

 “讚曰, 角乘初開三昧軸 舞壺終掛萬街風 月明瑤石春眠去 門掩芬皇顧影空”

 “무호(舞壺)로 세상을 교화하였으나, 달 밝은 요석궁에 봄 잠 깊더니, 문 닫힌 분황사에는 돌아다보는 소상만 쓸쓸하다.”하였다.
  이는 찬자 일연(一然)이 성사(聖師) 원효(元曉)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이는 굴레가 아니라는 불기(不羈)란 제명(題名)으로 집필 당시의 평가를 그가 후세에 전하고 싶었던 그만의 메시지는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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