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숲속의 대화

  • 기사입력 2021.04.26 20:27
  • 기자명 김미경
김미경
김미경

  조잘 조잘댄다. 산 속의 시냇물도 봄바람과 한창 수다중이다. 산허리에는 울긋불긋 진달래가 벌써 찾아와 앉았다. 노란 개나리도 빠질세라 양지바른 산비탈에 얼른 자리 잡았다. 매서운 겨울을 견뎌내고 다들 제자리에 용케도 찾아왔다.
  그를 만나기 위해 달려온 산자락이다. 오늘따라 그가 유난히 빛난다. 봄이라 그도 설레나보다. 맑은 하늘에 새털구름이 꼬리를 살랑댄다. 시냇가에 조심스럽게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도 내 옆으로 엉덩이를 비집는다. 수더분한 빛의 그는 내 눈에만 보인다. 자상한 아버지 같기도, 머리 조아리며 수학문제 같이 풀던 오빠 같기도, 신혼 초 다정하게 손잡아주던 남편 같기도 하다. 오늘 마침 잘 만났다며 입에 물었던 재갈을 푼다.
  그저 투덜거린다. 미처 하지 못한 말들도 서슴없이 내뱉는다. 속사포 같이 쏴 붙이다가, 산이 텅텅 울리도록 웃는다. 사람들이 내 맘 같지 않더라 하소연을 해댄다. 흉까지도 서슴지 않는다. 순간 잠에서 막 깬 나뭇잎들이 파르르 떤다. 맑은 시냇물 속 버들치도 시끄럽다며 꼬물거린다. 그러거나 말거나 속에 꽁꽁 얼어붙었던 울분을 토해낸다. 산 속에는 아무도 없다. 소리 없이 내 옆에 내려앉은 빛줄기 외에는.
  지난 겨우내 꼭꼭 걸어 잠갔던 자물쇠가 빗장을 열고 풀려나간다. 가벼워진 마음은 목소리를 한층 더 높인다. 순간 나뭇잎 사이로 그의 눈빛이 흔들린다. 맑은 공기 속으로 퍼져나가는 마음의 독이 쓰린가보다. 그의 고개가 내려갈수록 그림자도 깊어진다. 진달래가 낯을 붉힌다. 산다는 것이 어디 너만 힘든 줄 아냐며 산새들까지 재잘재잘 나무란다. 태양도 순간 구름 뒤로 숨어 버렸다.
  내 얘기만 너무 지껄였나싶어 이번엔 그의 이야기를 듣기로 했다. 지난날의 사랑을 들려준다. 그에게도 아픈 사랑이 있었다. 여기저기 벌레 먹고 할퀴었던 자국들이 나무둥치 위에 선연하다. 군데군데 옹이도 박혀있다. 사람들의 이기심이 그를 아프게 했단다. 깊은 산 속 나무들도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해 차가운 흙을 꽉 움켜쥐고 버틴 거란다. 저 진달래도 빨간 꽃물을 퍼 올리기 위해 얼어붙은 땅을 깨어가며 악착같이 핀 거란다. 너만 아픈 게 아니란다. 아픈 것이 삶이란다.
  막 올라오던 새싹도 움찔거린다. 개나리가 한 마디 거든다. 따뜻한 봄날이란다. 왜 아직 지나간 겨울에 머물러 떨고 있냐며 얼굴이 노랗게 살랑거린다. 딱딱한 돌 틈을 헤집고 올라온 민들레도 이제야 알겠냐는 듯 고개를 까닥거린다. 가는 겨울은 미련 없이 놓아주어야 비로소 봄이 오는 거란다. 막 깨어난 싹들처럼 기지개를 켜보란다. 혹독한 겨울을 지나왔기에 봄이 더 따뜻한 거란다.
  그제야 주변을 둘러본다. 내가 흘린 마음의 파장으로 군데군데 그늘이 져있다. 나의 투정이 산을 괴롭히고 있는 줄 그제야 알아차린다. 얼른 자리를 털고 일어선다. 아직은 짧은 봄 햇살이 산그늘에 밀려나기 시작했다. 부랴부랴 미안한 마음을 뒤로한 채 산을 내려온다.
  내려오는 길에 아담한 호수가 보인다. 잔잔한 호수에 얼비친 산이 연초록빛이다. 아직은 파르스름한 수면 위로 나의 모습이 어린다. 불평으로 가득 차있는 내가 훤히 들여다보인다. 순간 부끄러워 눈을 감는다. 그는 그림자처럼 뒤만 따라오고 있다. 고개 숙인 내가 측은해 보였는가보다. 호숫가에 핀 진달래를 한 아름 꺾어 안겨 준다. 꽃술싸움을 하잔다. 내가 먼저 뽑으란다. 아무거나 하나 뽑았다. 그도 하나 뽑는다. 번번이 내가 이긴다. 의아해서 한용운의‘꽃 싸움’시를 찾아 읽었다.
 '정말로 당신을 만나서 꽃 싸움을 하게 되면 나는 붉은 꽃 수염을 가지고 당신은 흰 꽃 수염을 가지게 합니다. 그러면 당신은 나에게 번번이 지십니다. 그것은 내가 이기기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나에게 지기를 기뻐하는 까닭입니다.'
  살펴보니 오른손에는 붉은 꽃수염이고 왼손은 흰 꽃수염이다. 그는 일부러 나에게 져주고 있었다. 단지 기뻐하는 나를 위해서. 사랑은 이기거나 지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기쁘게 해주는 것임을 진달래 꽃 싸움에서 배운다. 산을 내려온다. 내려오는 산길 푸른 솔가지에 그가 등불 하나를 매달아준다. 자기가 없더라도 더 이상 길을 잃지 말라고. 산길 내려오는 내내 마음에 등불 하나가 켜졌다. 산 아래 도시의 가로등도 하나 둘 불을 밝히기 시작한다.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꽃이 세상 어디에 있을까. 흔들렸기에 더 깊은 땅 속에 뿌리박고 피어난 것이리라. 비탈진 곳에 핀 풀꽃들도 언 땅을 헤집고 나와야만 봄을 알릴 수 있다. 그래, 부딪히고 넘어지다 보면 언젠가는 더 큰 꽃으로 피어나겠지. 아팠던 만큼 더 단단한 열매가 열리리라. 여기저기서 꽃망울 터지는 소리가 산 밑 도심까지 향긋하게 퍼져나간다.
  혹독한 겨울은 어김없이 닥쳐온다. 하지만 길 것만 같던 겨울이 지나고 나면 봄날 또한 반드시 찾아오지 않았던가. 상처 받고 주저앉은 하루하루가 거름이 되어 오늘이란 숲에 또 이르렀을 터이다. 숲은 산짐승이나 사람들이 이리저리 밟고 지나가도 결코 노여워하지 않는다. 그 발자국까지 덮어주는 게 숲이다. 나의 숲도 그렇게 깊어 가야할 일이겠다. 온종일 조잘대던 숲 속의 대화도 사방 고요해졌다. 모두가 까만 밤 속으로 잠들 채비를 서두른다.
  그가 떠나려한다. 그는 그를 필요로 하는 곳에서 또 다른 빛으로 머물 것이다. 그의 눈빛 뒤로 나지막한 소리가 들려온다. 맑은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라고, 맑은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라고. 어느덧 그가 뉘엿뉘엿 서산으로 넘어간다. 산 그림자도 내려와 도시를 끌어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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