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행복과 경제이야기
[1] 행복과 경제이야기
  • 대구대학교 명예교수_박천익
  • 승인 2021.05.18 2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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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학교 명예교수 박천익
대구대학교 명예교수
박  천  익

  요즘 행복이란 말이 시대적 유행어가 되어 사용되고 있다. 행복세상, 행복마을, 행복학교, 행복문학, 행복동아리, 행복장터, 행복여행, 행복노래모임 등 무슨 일이든 행복과 관련지어서 일을 하고 싶어 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행복이 최고인 것처럼 보이는 세상이다. 무슨 슬로건이나 인사말에도 행복이란 단어는 애용된다. 행복한 사회생활을 위하여“학생이 행복한 대학”인사말도“행복하십니까?”로 시작하여“행복하십시오?”라고 끝마무리를 한다. 행복이란 단어가 요즘처럼 약방의 감초같이 흔하게 쓰여졌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요즘 불행한 사람이 많아져서 행복을 갈망하는 마음이 갈급해서일까? 현대인들이 이제야 행복의 중요성을 깨달아서일까? 어쩌면 요즘 우리사회는“행복 갈망증”에 걸린 사람이 되어 가는지도 모른다. 세상을 놀라게 하는 일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벌어지는 세상이어서 인지도 모른다. 가슴을 덜컹 내려 앉히는 끔찍한 사건들이 세상을 행복의 세계에서 와장창 멀어지게 하는 세상이다. 인간윤리를 송두리채 무너뜨리는 가족 살인사건, 일자리를 찾지 못해 좌절하는 청년실업자들이 탄식, 소통의 대상을 찾지 못해 고독에 절망하는 독거노인들의 허탈 등이 모두 세상을 행복에서 멀어지게 하는 불행의 씨앗이다. 어쩌면 요즘 코로나19로 시달리는 사람들의 마음은 행복이라는 말이 꿈나라의 얘기처럼 아득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그래서 행복이라는 말이 더욱 절박하게 요구되는지도 모른다.

  필자는 현대인들이 행복이라는 말을 생활용어로 크로즈 업 시키는 이유를 대체로 두 가지 사실에서 찾고자 한다. 하나는 이제 사람들이 삶의 궁극적 가치가 행복에 있음을 자각하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본질적으로 행복한 삶의 실현이 모든 인류의 지상과제임을 공감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이다. 21세기는 문화의 세기라고 얘기했다. 문화의 세기라 함은 문화적인 요소가 삶의 중요 비중을 차지하는 세기임을 말한다. 문화란 그것을 향유 함으로써 인간의 궁극목표인 행복감을 증대시킨다. 누가 우리에게 왜 사느냐고 물으면“행복을 추구하기 위하여”라고 쉽게 대답한다. 그렇다면 행복은 과연 무엇이며, 그것은 어떻게 실현되는 것일까? 행복의 파랑새 동화이야기는 주인공이 행복을 찾으러 집을 나갔다가 깊은 산과 들, 어디를 돌아다녀도 행복의 파랑새를 찾을 수가 없어, 집으로 돌아왔더니 집안 새장에 있던 새가 바로 행복의 파랑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야기의 주인공이 새장의 문을 여는 순간 파랑새는 멀리 날아가 버렸다는 이야기이다. 행복은 그 만큼 자신의 주위 가까이에 있는 것임을 일깨우는 얘기이기도 하고, 또한 행복의 실체는 그것을 지각으로 알려고 하는 순간 우리에게서 멀리 달아날 수도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일러주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행복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보다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자. 행복은 글자 그대로 새겨보면 다행할‘幸’과 복‘福’자로 만들어진 단어로“다행한 복”을 의미한다. 즉 다분히 인간이“자의적인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닌 어떤 외부적이고 운명적인 요소에 의하여 잘 이루어지는 상태”라고 볼 수가 있다. 그래서 예부터 행복은 주관적이며, 또한 추상적인 인간의 마음상태로 느껴지는 것이기 때문에 문학이나, 철학, 신학과 같은 인문과학과 같은 주관적인 인간의 내면세계를 다루는 분야에서나 취급할 문제이지 결코 실증적 검증을 통해서 현실의 상황을 설명하는 경험과학이 다룰 분야는 아니라고 보았다. 즉 행복은 결코 수량적으로 그 크기를 표시할 수 있는 문제이거나 계량적으로 측정하여 실증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행복은 마음으로 느끼고 깨달음으로 체득하는 정신적인 문제의 영역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물량적 크기로 상태를 측정하고 평가하는 경제학이란 학문에서는 아예 행복의 문제를 연구의 범주에 들여놓는 것을 배척해 왔다.

  그러나 과연 행복은 경제적인 문제와 무관하게 존재하는 추상적이고 주관적인 문제일 뿐이라는 전통주의 가치관이 현대인들의 생각에 흔쾌히 동의를 얻을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생각보다 쉽지 않을 것으로 필자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금 풍요한 물질주의가 세상을 지배하는 시장자본주의 경제체제에 살고 있다. 일찍이 근대경제학을 창건한 캠브리지대학의 성자경제학자 알프레드 마샬(Alfred Marshall,1842∼1924)은“인간은 생존을 위해 두 가지 궁극적인 과제를 안고 있는데 하나는 종교의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물질의 문제라고 했다. 종교의 문제는 믿는 자에게만 중요하나 물질의 문제는 모든 인류의 생존을 위해 중요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래서 경제학자들은 행복과 유사한 개념, 즉, 복지(welfare, well-being) 또는 효용(utility)이라는 개념을 갖고 인간의 궁극적 과제인 행복을 간접적으로나마 계측하고 싶어 했다. 경제학자들은 일단 잘 사는 것이 간접적이나마 행복의 파이를 키울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경제학은 자나 깨나 인간이 잘사는 방법을 연구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잘 사고 못 사는 것을 화폐의 크기로 나타내어 그 크기를 갖고 복지수준을 측정해서 행복의 파이를 알고 싶어 했다. 복지와 행복이 분명하게 동일한 개념은 아님에도 말이다. 경제학은 행복처럼 아예 골치 아픈 주관적인 만족도, 효용 등의 문제는 집어치우고 객관적인 지표로 나타낼 수 있는 국민후생(national welfare) 또는 경제복지(economic welfare)지표의 크기로 복지수준을 측정하여 객관적인 비교가 가능한 국민총행복의 크기를 측정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경제학이 근대적인 분석도구로 과학화되기 이전, 18세기의 공리주의 철학자 제레미 벤담(Jeremy Bentham,1748∼ 1832)은 행복의 크기를 계량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18세기 영국의 계몽주의 사상을 중시여기면서 국민들의 복지에 관심을 기울이고, 인생의 목적을 쾌락에 있다고 보고 쾌락은 곧 행복과 같은 것으로 생각했다. 다만 그 쾌락이 개인주의적인 것이어서는 안되며 여러 사람들에게 연결되는 공중적 쾌락으로 승화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벤담은 행복을 결정하는 쾌락과 그 반대인 고통을 비교하여 순 행복의 크기를 측정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그는 끝내 그것이 불가능한 일임을 알고 절망하여 그의 저서들을 모두 불태우기도 했다.

  벤담에 이어 고전경제학자의 마지막 보루로 일컬어지는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1806∼1873)에게까지 이러한 공리주의 철학을 바탕으로 한 벤담의 사상은 전수되었으나, 복지의 문제를 경제학의 영역에서 체계적으로 연구한 사람은 이른바 복지경제학의 창시자 아더 세실 피구(Ather Cecil Pigou.1877∼1959)였다. 그는 신고전학파 경제학의 대가였으며 공리주의 철학을 바탕으로 <복지경제학(The Economics of Welfare,1920)>을 저술하여 국민의 복지를 증가시키는 방법을 설명했다. 그러나 소위 국민분배분(국민소득)의 크기의 변화로 경제적 복지를 측정하고자 했던 그의 노력은 당시의 많은 경제학자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이로써 현대경제학은 현실적으로 행복을 대신할 수 있는 복지측정의 문제에서 크나큰 장벽에 부딪히고 만다. 현대경제학은 효용측정 문제를 두고 기수적 효용이론과 서수적 효용이론의 방법론적 논쟁만 남긴 채 실증주의의 힘에 밀려, 행복의 경제적 접근 문제를 내팽개친 채 근 100년 동안 잠자고 있어 왔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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