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도 개칭된 일광리(日光里)는 진정 일제(日帝)가 싫어했나?

지명유래 바로 알기

  • 기사입력 2021.06.08 21:25
  • 최종수정 2021.06.08 21:27
  • 기자명 김종국 기자
선의산 정상 쇠말뚝 적출
선의산 정상 쇠말뚝 적출

  언제부터인가 일제가 우리 민족정기를 끊겠다는 의도로 곳곳의 명당지혈에 쇠말뚝을 박았다는 언론보도가 잇따르면서 이와 같이하여 일제 강점기에 일제에 의해 강제로 개칭되었다는 지명(地名)을 지역민들의 제보를 토대로 지방자치단체가 나서 본래대로 환원하는 사례가 전국적으로 속출하였다.

  그 대표적 사례로, 경상북도 경산시 용성면 쟁광리(爭光里)를 본래 일광리(日光里)라 하였으나, 일제 강점기에 일제가 "경치 좋고 아름다운 일본(日本)의 '일광(日光)'과 똑같다며 강제로 이름을 바꿔버렸다 하였고, 대전광역시에 있는 계족산(鷄足山) 역시 애초 봉황산(鳳凰山) 이었지만, 일제가 봉황을 닭으로 격하시켜 이름을 계족산으로 고쳤다 하였고, 서울특별시 강북구와 경기도 고양시 경계에 있는 백운대(白雲臺) 역시 일제가 주민들의 기상을 꺾기 위해'백운봉(白雲峯)'으로 바꿨었다 하여 논란이 된 사례가 있었다.

  이에 경산시 역시 관내 선의산 등에 박혀있는 쇠말뚝을 뽑아내고, 연이어 왜곡된 지명을 환원하는 방안을 당해 지역 주민들과 일부 지명유래 연구가들의 건의로, 지난 2007년, 용성면 쟁광리(爭光里)와 남천면 대명리(大鳴里)가 거명되었으나, 이중 남천면 대명리(大鳴里)는 한자의 음훈대로 “크게 운다는 뜻”이 아니고, 예로부터 이 마을을 수호하던 큰 학(鶴)이 마을을 떠나기 싫어 크게 울었다는 동학산(動鶴山)의 지명과 함께 마을을 이롭게 하는 지명(地名)이라 하여 철회되고, 지금의 용성면 일광리(日光里)는 경산시 지명위원회에 상정되어 당시 쟁광(爭光)을 일광(日光)으로 2007년에 개칭 의결하였다.

경상북도 지명유래 총람(1984)
경상북도 지명유래 총람(1984)

  이에 대하여, 당해 주민들은 별 저항 없이 이를 수용하였으나, 여기에는 학계의 지적 또한 없지 않다.

  먼저 1984년에 발간한 경상북도 지명유래 총람과 1990년 발간 경북 마을지에 하나같이 쟁광리는 본래 쟁광·쟁광골·소금뱅이·쟁광곡리라 하였고 1910년 이전까지 자인현 상동면에 속한 지역이라 소개되어 있다. 하지만, 여기에 문제점은 집필 당시 제보자가 일제 강점기에 일광리가 불렀다 하였으나 이를 증빙할 수 있는 자료는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다.

  위의 기록(지명유래)에 대하여 일각에서는 일광(日光)의 의미에 대하여, 음운론적으로 일본(日本)과 빛을 상징하는 의미를 부여하는 것으로, 지명유래 제보자의 제보와 같이 일제가 그 지명에 대하여 심술이 나서 일광이란 지명을 저지하였다는 표현은 합당하지 않다는 지적과 함께, 음운적(音韻的) 의미에서도“태양의 빛”이란 곧 일본이란 존재적 의미를 상징할 수 있다는 점에서 부적절한 제보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경북마을지(1990)
경북마을지(1990)

  실제 현존하는 일광리 이전의 쟁광리(爭光里)는 지형적으로 남으로 용성면의 주산인 용산(龍山) 자락이 오목천을 적시고, 그 사이에 금학산을 가득 메운 수만 평의 농지들은 쟁광 인들을 풍요롭게 하는 기름진 옥토로, 1970년대 이후 이 일대 대규모 경지정리가 이루어지기 이전에는 약 200여 기에 달하는 지석묘(支石墓)가 군락을 이루었던 명당지지로, 이로써 용성면이 신석기(新石器)시대 이전부터 취락(聚落)이 형성되었던 고장임을 입증하는 소중한 자료가 되었던 것이었으나, 경지정리로 무차별하게 부서지고 매몰되어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으니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1700년대 영남읍지
1700년대 영남읍지

  70이 넘도록 이 마을을 지켜온 K모씨는 마을 앞 넓은 농지 속에 분포된 지석묘가 이 마을 농민들에게는 따뜻한 수온(水溫)을 유지하게 지켜주는 지킴이로 농신(農神)과 같은 존재였다고 회고하였다.

  이 증언은 곧, 조선 시대부터 끊임없이 이 마을을 지켜온 쟁광(爭光)이란 지명은 단순히 빛과 싸운다는 의미보다는 따가운 햇볕에는 거대한 지석묘가 수온(水溫)을 낮춰주고, 냉기가 지속되면 햇살을 품은 온기로 마치 청산도의 구들장 논과 같은 역할을 하였으니, 넓은 들판에 산재(散在)한 지석묘는 때로는 햇살을 조정해 주고, 때론 빛과 부닥치는 쟁광(爭光)이었음은 이 마을을 처음 전거해 온 개척자만이 그려본 미래의 지명이었으리라.

1800년대 자인현지
1800년대 자인현지

  또한 여러 편의 자인현지, 읍지에서도 1899까지는 이 마을의 지명을 단 한 번도 개칭하지 않고“쟁광(爭光)”이라 하였고, 일제 강점기에 편찬한 읍지(邑誌)에도 일광(日光)이란 표현은 기록에서 찾아볼 수 없다.

  또한 일제 강점기에 출간한 경산군지와 소화 7년(1932)에 출간한 황기식 저“자인현읍지 그 어느 곳에서도 쟁광(爭光)이란 지명 이외에 일광(日光)이란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1800년대 자인군지
1800년대 자인군지

  그렇다면 어찌하여 1984년 경상북도 지명유래 총람 편찬 시 ‘이 마을에는 소금장수들이 울산에서 대구까지 왕래 시 쉬어간 곳, 이라 하여 일광(日光)이라 불렀다는데, 하필이면 그 시대가 일제 강점기이고, 일본에 경치 좋고 아름다운 곳에 일광(日光)과 연계하여 일광리(日光里)가 잘사는 마을이라 하여, 셈이난 나머지 그때부터 쟁광리(爭光里)로 일제가 개칭하게 하였다는 논리의 제보는 그 어떤 변명도 언어도단이다.

1889년 자인총쇄록
1889년 자인총쇄록

  쟁광(爭光), 그 이름은 경산시 용성면의 역사요, 용성인의 삶의 흔적이다. 비록 지금은 또 다른 이름으로 개칭되었지만 용성인들 가슴 속에는 쟁광(爭光)은 빛의 싸움보다는 광활한 농지에 풍년 농사를 일구어내기 위하여 햇살을 끌어모으는 이 지방 옛 선인(先人)들이 풍년에 거는 지혜요, 길이 후대에 남겨놓은 아름다운 메시지는 아닌가 싶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