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구룡산 영지사를 답사하고

  • 기사입력 2021.06.08 22:26
  • 기자명 수필가 전명수
송하 전명수교육행정질 공무원 정년퇴직계명문화대학교 출강대구.경북 범죄예방위원유네스코대구협회 부회장대구문화제짐이회회원대구생명의전화 상담원2.28 민주운동기념사업회 회원저서:수필집[실개천에 부는 바람]외 다수녹조근정훈장 수훈
송하 전  명 수
ㆍ교육행정질 공무원 정년퇴직
ㆍ계명문화대학교 출강
ㆍ대구.경북 범죄예방위원
ㆍ유네스코대구협회 부회장
ㆍ대구문화제짐이회회원
ㆍ대구생명의전화 상담원
ㆍ2.28 민주운동기념사업회 회원
ㆍ저서 : 수필집[실개천에 부는 바람]외 다수
ㆍ녹조근정훈장 수훈

  신록의 계절이 다하고 유월에 접어드니 제법 여름 맛이 나는데 오늘은 비가 내린다. 소리 없이 내리는 비를 길동무 삼아 집을 나섰다.

  오늘 찾은 곳은 구룡산(九龍山)자락에 자리 잡은 영지사(靈芝寺)이다. 경산, 영천시 대창을 거쳐 영지사로 오르는 시골길은 도로 사정이 신통치 아니한데 빗길이라 천천히 달렸다. 시골 마을 길이 좁기도 하지만 꼬부랑길이 연속으로 이어져 속도를 낼 수가 없다. 차량이 원활하게 교행할 수 있도록 도로를 확장해야 하겠다. 영지사는 고향마을과 거리 멀지 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음에도 이제야 찾아보게 되었다.

  구룡산 영지사는 경북 영천시 대창면 영지길 471(용호리),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 은해사의 말사이다. 신라 태종무열왕 때 의상대사가 창건하여 웅정암(熊丼庵)이라 하였다. 선조 25년(1592)에 소실되었다가 선조 36년(1603)에 지조(智照)와 원찬(元贊)이 새로 짓고 절 이름을 영지사로 바꾸었다. 영지사의 경내 전각은 대웅전과 명부전, 범종각, 삼성각, 심검당(尋劍堂), 요사채 2동 등이 있다.

  영지사 대웅전은 영지사의 주 불전으로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20호로 지정되어 있다. 1992년에 중수하였으며 2015년에도 해체 복원하였다. 대웅전의 기단은 자연 장대석으로 축조되었고 자연석 주초석에 둥근 기둥을 사용한 다포식 팔작지붕 건물이다. 전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사방 모서리에는 활주를 세웠는데 건물이 아담하며 소박한 모습으로 바라보인다. 겹처마에 금단청을 하였으며, 다포계 형식으로 짜 넣은 포작이 참으로 화려하다. 외부의 포작보다 법당 안쪽의 포작이 화려하여 대목장의 솜씨가 돋보인다. 전각의 규모에 비하여 처마가 길게 빠져나와 시각적으로 안정감을 주기 위해 활주를 세운 듯하다.

  영지사 대웅전 후불탱화는 세로 209.1㎝, 가로 207.7㎝ 크기의 방형(方形)에 가까운 비단 바탕에 채색한 작품으로,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84호로 지정되어 있다. 중앙에 본존인 석가모니불 좌상을 크게 그리고, 양측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배치하였으며, 그 뒤쪽에는 가섭과 아란, 제자상 2위 등을 배치한 간략한 구성이다. 천공과 배경에는 채운을 장식해 있고, 화면 하단에는 장문의 화기가 기술되어 있다. 화기를 통해 건륭 41년(1776)에 양공(良工) 취징(取澄)을 비롯하여 화사(畵師) 정총(定聰), 도한(道閑) 등이 참여하여 제작한 불화임을 알 수 있다.  이 불화는 부분적으로 안료의 변색으로 훼손이 심한 편이나, 18세기 후반에 제작되었으며 선명한 색감 등이 돋보이는 수작이다. 본존 법의의 장식 문양이나, 나한상의 환상 점묘식 문양 등은 18세기 전반기 양식을 이어받은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 탱화의 원본은 따로 보존되어 있고, 현존 탱화는 영인본이라 했다.

  대웅전 법당에는 주불로 석가모니불을 봉안하고 좌우편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협시해 있다. 그런데 이 불상은 한때 수난을 당한 이야기가 전해온다. 지금으로부터 약 100여 년 전에 도난당하였다 했다. 이후 삼존불을 새로이 봉안하였으나, 최근 경내지 인접 산비탈에 당시 불상이 매장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는데, 이 중 1점은 찾을 수 없어 당시의 사진을 통해 복제하여 대웅전에 봉안하였다 했다. 이로써 갈 곳이 없는 이전의 불상은 지금 심검당에 봉안되어 있었다.

  심검당(尋劍堂)은 지혜의 칼을 찾는 집이라 하여 심검당이라고 한다. 심검당의 검(劍)은 마지막 무명(無明)의 머리카락을 단절하여 부처의 혜명(慧明)을 증득(證得)하게 하는 칼을 상징한다.

  대웅전 불단 서편 천장에 반야용선(般若龍船)이 매달려있고, 배에서 내려온 밧줄을 붙잡고 안간힘을 쓰는 보살의 모습에 공연히 용이 쓰인다. 반야용선은 큰 지혜로서 피안의 세계로 용이 이끄는 지혜의 배인데 극락세계 왕생에 대한 중생의 간절한 염원을 상징화한 것이라 했다. 극락세계로 향하는 반야용선을 놓쳐버려 발을 동동 구르는 중 선장인 관세음보살이 던져준 밧줄에 악착같이 매달려 극락으로 향하는 악착 보살의 모습이 안쓰럽기만 했다.

  대웅전 앞마당에는 삼층석탑이 서 있다. 영지사 삼층석탑은 기단부가 없어져 새로 제작한 것이며 1층 지붕돌과 2, 3층 몸돌과 지붕돌만 남아 있는 상태이다. 남아 있는 몸돌에는 모서리 기둥인 우주(隅柱)가 새겨져 있고, 지붕돌 위의 낙수면은 비교적 가파르며, 두터운 2단 각형 받침이 있다. 아랫면의 층급받침은 3단인데, 정연하지 못하고 다소 거친 편이다.

  명부전(冥府殿)에 들어섰다. 영지사 명부전에 모셔진 석조지장시왕상은 모두 31구의 존상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영천 영지사 명부전 석조지장시왕상 일괄이라는 명칭으로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85호로 지정되어 있다. 지장보살좌상을 중심으로 왼쪽에 도명존자와 오른쪽에 무독귀왕이 시립한 지장삼존상이 3단으로 구성된 불단 위에 봉안되어 있으며, 불단 좌·우측에 단을 낮춰서 10구의 시왕상과 동자상 10구가 배치되어 있다. 이어서 시왕상이 위치한 끝단 좌우에는 다시 단을 낮춰서 판관상 2구와 귀왕상 2구, 명부사자상 2구를 배치하였다. 그리고 2구의 금강역사상은 바닥에 놓여 있다. 재질은 모두 불석으로 시왕상의 수염이나 지물 등에 일부 보수된 흔적이 있으나, 보존 상태는 대체로 양호한 편이다. 조상기가 발견되지 않아 정확한 제작연대를 알 수 없으나 양식적으로 볼 때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반에 조성된 작품으로 추정되었다.

  명부전(冥府殿)은 불교 설화에서 사람이 죽으면, 10명의 왕인 시왕의 심판을 받게 된다는데, 이에 망자는 생전에 지은 죄의 경중에 따라 가려지게 된다고 한다. 여기에 5시왕인 염라대왕은 업경(業鏡)으로 죽은 자의 죄를 비추어 볼 뿐만 아니라, 경책에 개개인의 죄업(罪業)을 낱낱이 기록해놓았기 때문에 추호의 거짓말을 할 수가 없다. 염라대왕은 경책을 주로 머리 위에 얹어 놓는데 간혹 손에 들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 이곳 명부전에는 염라대왕이 경책을 펼쳐들고 있어 그 어느 시왕보다 경외심이 있다.

  대웅전 앞 서북쪽 길목을 지키고 서 있는 영지사 범종각(永川 靈芝寺 泛鐘閣)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구조는 중층 누각에 익공계 팔작집으로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63호로 지정되어 있다.

  상·하층은 벽체가 없이 사방이 트여 있다. 현재 범종각 좌우로는 대웅전 영역으로 접근하는 통로가 있다. 상층의 내부 바닥에는 우물마루를 깐 뒤 법고, 법종, 운판, 목어 등 불전사물이 걸려있다. 종각의 구조는 자연석 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에 겹처마 팔작집이다. 종각의 앞과 뒤편에 범종각 현판이 달려있었다.

  한나절 우산을 받쳐 들고 영지사를 찾아와서 많은 상식과 한층 더 깊이 있는 문화재 공부를 한 시간이 되었다. 꼬부랑 시골길을 지나 작은 고개를 넘어 고향인 용성면으로 향하는 필자의 머릿속은 시공을 넘나든 듯 격세지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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