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룡산 반룡사
구룡산 반룡사
  • 송하 전명수
  • 승인 2021.08.08 19:0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송하 전명수교육행정질 공무원 정년퇴직계명문화대학교 출강대구.경북 범죄예방위원유네스코대구협회 부회장대구문화제짐이회회원대구생명의전화 상담원2.28 민주운동기념사업회 회원저서:수필집[실개천에 부는 바람]외 다수녹조근정훈장 수훈
송하 전명수

  모처럼 봄의 훈기가 감도는 화사한 날 고향에 소재한 절집을 찾아 나섰다. 경산시 용성(龍城)의 주산인 용산을 바라본다. 어린 시절에 매일 쳐다보고 소풍도 자주 갔던 산이다. 슬픈 전설이 전해오는 비오재(飛烏岾)를 넘어 청정 미나리 단지를 지나 반룡사로 향하였다. 구룡산 반룡사는 경북 경산시 용성면 용전1길 60(용전리)에 위치해 있으며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 은해사의 말사이다. 신라 무열왕 7년(661)에 경산 출신인 원효성사(元曉聖師)가 창건하였으며 창건 당시에는 삼국통일의 성업을 달성하기 위한 호국도량으로 우리나라 삼대 반룡사 중 영남의 고찰로 알려져 있다. 

  구룡산을 아우르는 반룡산은 신라시대부터 지금의 경산인 압독국(押督國)이 동반관계를 이루면서 신라 제5대 파사왕, 제6대 지마왕, 제7대 일성왕이 삼한일통(三韓一統)을 달성하기 위하여 이곳 반룡사가 소재한 왕재를 넘나들었다고 한다. 642년과 653년에는 김유신과 김인문이 압량주의 군주와 총관으로 부임하면서, 또 제29대 태종무열왕은 압량에 주병을 모아 백제 대 정벌에 참여하였던 입성 통로로 이 고개를 왕재(王峴)라 하였다. 

  고려시대 원응국사(圓應國師)가 운문사를 중창하고 문득 반룡산하에 이르러 빈산의 칡넝쿨을 걷어내고 허물어진 사지(寺址)를 일으켜 신흥사라 하자 전국에 수많은 석학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고 한다. 이때 당대의 석학인 이인로(李仁老, 1152-1220) 선생도 반룡사에서 낙조의 아름다움을 엮은 산거(山居)라는 시를 통하여 산사의 고즈넉함을 애절하게 표현하기도 하였다. 

  1637년 자인현(慈仁縣)이 경주부(慶州府)에서 복현(復縣)되자 초대 현감인 임선백(任善伯, 1637-1641)은 이 모두가 선현의 공덕이라 하여 옛 조사와 성사의 은덕을 찾아 구룡산 아래 허물어진 사지를 일으키고 인조 14년(1641)에 계운, 명언으로 하여금 선당(禪堂)을 세우게 하여 이로써 60여 년에 걸쳐 27대의 현감에 이르도록 내원암, 벽운암, 대적암, 은선암, 안적암 등 무려 5개의 산내 암자와 26동의 대 가람을 완성하니 이에 반룡이 승천한 격이라 이름하여 반룡사라 하였다. 임진왜란과 몇 차례의 화재로 인하여 웅장하였던 옛 가람은 소실되었으나 현재 사찰은 1997년 이후 복원을 거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과 천불전, 산령각, 요사채, 종무소, 누각이 있으며 마당에는 최근에 세운 삼층석탑이 서있고 반룡사 석조유물(石造遺物)이 한자리에 정리되어 있다. 대웅전은 1999년에 건립하였는데 겹처마 다포계 양식의 팔작지붕으로 앞면 3칸, 측면 3칸의 전각이며 특이한 서체로 쓴 대웅전 현판은 현주지 혜해 스님의 스승인 일타 스님의 글씨라 한다. 법당에는 철불(鐵佛)로 개금한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옥돌로 개금한 지장보살과 관음보살이 좌우에 협시하고 있는데 모두 1999년에 조성하였다. 석가모니불 뒤편에는 영산회상탱이 결려있고 그 좌우에 칠성탱과 신중탱이 걸려있으며 우측 벽면에는 지장탱이 걸려있다. 외벽에는 원효성사의 행적을 담은 당나라 구법의 길인 토감 속에서 깨달음의 순간 등의 벽화가 그려져 있다.

  천불전(千佛殿)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에 익공식 양식인데 단청이 화려한 모습이다. 내부에는 철불로 개금한 아미타불이 봉안되어 있으며 좌우에는 역시 철불로 조성, 개금한 관음보살 천불이 봉안되어 있다. 반룡사는 동해의 낙산사와 남해 보리암, 서해의 강화도 보문사와 함께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4대 관음기도처로 알려져 있다. 산령각 뒤편 높은 곳에 백의관음보살 입상이 큼직하게 세워져 있다. 산령각(山靈閣)은 앞면, 측면이 각 1칸의 작은 전각으로 내부에는 1989년에 조성한 산신탱과 독성탱이 걸려있다.  

  오래전 대웅전에는 목조관음보살상이 봉안되어 있었는데 어떤 연유인지는 알 수 없으나 지금은 청도 대운암에 봉안되어 있어 회수코자 노력 중이라 한다. 그리고 보물 제11-1호로 지정된 청하 보경사 서운암 동종은 사인 비구의 작품으로 이곳 반룡사 동종이라 종신에 분명히 나타나 있다.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는 절집의 사연이다. 언제인가는 알 수 없으나 절집 살림이 어려워 주지승이 이 동종을 팔았는데 지금은 보경사에 소장되어 있고 서운암 동종이라는 이름으로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보물급 동종이 제자리로 돌아오게 할 방법이 있으면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라 하겠다.

  대웅전 앞마당 남쪽에는 반룡사지 석조유물(盤龍寺址 石造遺物)이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는데 대략 70여 점으로 바라보인다. 이 석조부재(石造部材)는 인조 14년(1637)에 자인현이 경주부에서 복현되자 초대 현감 임선백이 이곳에 선당을 짓게 하였으며 그 후 60여 년 만에 대가람을 조성하였는데 이때 조성된 석탑과 석등, 당간지주, 부도, 비석 등의 부재를 정리한 것이다. 이 석조부재는 반룡사의 번창기와 더불어 배불정책의 폐해와 원인을 알 수 없는 화마로 모두 부서지고 그 일부가 석축으로 사용되어 오던 것을 2008년 천불전을 해체 복원할 때 이를 수습하여 한자리에 정돈해 놓은 것이다. 본 석조물은 화강석을 깎아 만든 조각과 조형으로 석면에 새겨진 연화문양과 금석문은 조선중기의 불교미술과 조형성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고 설명해 놓았다. 

 이 가운데 화문면석 부재 10점이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657호로 지정되어 있다. 경산 반룡사 화문면석 부재(慶山 盤龍寺 花紋面石 部材)는 주불전의 기단 면석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꽃문양이 새겨진 면석 부재로 17세기 영남지역 건축의 특징이 반영된 석재로 주목된다. 그 사례가 흔하지 않은 유물로서 통도사 대웅전, 범어사 대웅전 등 사격(寺格)이 높은 조선후기 사찰의 주불전 건축에 적용된 사례가 있을 뿐이다. 이 화문면석 부재는 반룡사의 사격이 반영된 중요한 유물일 뿐만 아니라 17세기 영남지역에서 전개된 화문부조 가구식 기단의 계보를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학술적 가치를 지닌다. 

  화문면석 부재를 살펴보고 대웅전 옆 승방 앞을 지나는데 고려중기의 석학인 와도헌(臥陶軒) 이인로(李仁老) 선생이 이곳에 와서 남긴 산거(山居)라는 시가 걸려있다. 

 春去化猶在(춘거화유재) 
            봄은 가도 꽃은 아름답게 피어 있고
 天晴谷自陰(천청곡자음) 
            맑은 하늘 깊은 골에 그늘은 저절로 지네
 杜鵑啼白晝(두견제백주) 
            두견새 맑은 노래 대낮에도 지저귀니
 始覺卜居深(시각복거심) 
           깊은 골에 간직한 마음을 비로소 느끼게 하네.
    
  반룡사는 설총(薛聰) 선생이 성장한 곳이라 구전되어오고 있는데 여러 암자를 거느린 대찰이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는 등 소실과 중창을 거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관음 기도처로 널리 알려진 영험 도량이라고 한다. 대웅전 뒤편 높은 곳에는 백의관음 보살상이 세워져 있다. 설총이 우리 고유의 이두(吏讀)를 만들기 전까지 아직도 신라는 어려운 중국의 문자를 쓰고 있었으며 이를 타파할 새로운 문자의 창안이 시급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원효 스님과 요석공주의 아들로 잘 알려진 설총이 이두를 고안해내어 신라가 불교뿐만 아니라 유학까지 깊이 연구하게 돼 국가의 기틀을 잡아 나가는 데 크게 일조했으며 우리 선인들의 문자 생활을 비롯한 우리 문화의 발전을 한층 앞당겼다. 

  이는 원효성사가 요석공주를 만나기 전 저자거리를 돌며“수허몰가부 아작지천주(誰許沒柯斧 我斫支天柱)”즉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내게 주려는가. 내가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찍어 세우리라. 고 노래했던 그 의미는 아들을 낳아 나라의 기둥을 삼고자 염원했던 것으로 풀이된다. 설총이 화왕계를 지어 스스로 백두옹을 자처하고 임금에게 간하고자 했던 것도 아버지 원효성사의 뜻과 맞닿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국가의 동량인 설총을 키워낸 반룡사도 원효 스님과 깊은 인연 때문에 설총의 유년을 이곳에서 보내게 되었지만, 정신적 귀의처인 사찰이 국가의 부흥에 이바지할 수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더구나 신라의 임금과 왕후가 인근 왕재(王峴)를 넘어 이곳에서 설총 모자와 함께 불공을 드릴 정도로 열과 성을 다했으니 반룡사가 차지하는 위상도 상당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반룡사는 조선시대로 내려오면서 억불정책과 화재로 인해 쇠락(衰落)을 거듭해 왔다. 일제 격변기를 거치며 거의 멸실되다시피 한 반룡사가 현대에 이르러 다시 제3의 중창기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사하촌인 용전마을까지 모두 반룡사의 사역에 속해있었던 이곳 절집은 고작 480여 평 정도의 공간만 남아있으나 가람을 하나둘 중건하고 구룡산 자락에 작은 길도 내어 평양, 고령, 경산에 소재한‘해동 3 반룡사’라는 명성을 이어가는 토대를 닦아 나가고 있는 중이다.

  반룡사는 고향에 소재한 절집이며 친구가 이곳 반룡사 신도회장을 맡고 있어 그동안 수차례에 걸쳐 다녀갔지만 반룡사의 역사와 내력 그리고 상세한 문화재에 대하여 살펴보지 못했는데 오늘 구석구석 살펴보니 우리 역사에 걸출한 인물인 원효성사의 숨결이 느껴진다. 그리고 마음조이며 남편을 그리워하였던 요석공주의 애절한 마음도 읽어 보았다. 반룡사에서 바라보는 석양의 낙조(落照)는 참으로 아름다운 광경이라 하는데 언제 청명한 날 다시 올라와서 그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해 보고 싶어진다. 그동안 이곳 절집 살림살이가 어려워 보였는데 군데군데 불사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가꾸고 다듬은 손길의 흔적이 엿보인다. 수많은 불자와 문화재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찾아와 관음보살의 가피를 입어 행복한 웃음을 거두어가길 빌어보며 발길을 돌린다.(2021. 2. 28. 일)   
  * 참고자료: 영남읍지 자인총쇄록, 신증동국여지승람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