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블루베리 농사

  • 기사입력 2021.10.04 19:08
  • 기자명 김미숙
김미숙
김미숙

  농협에서 수십 년 동안 근무하다 퇴직을 한 이재권씨를 만났다. 자그마치 삼십 오 년을 한 곳에서 일했으니 회사를 위해 한평생 산 거나 마찬가지다. 그는 직장 생활을 하면서 어렵고 힘든 일 없이 순탄하게 보냈다. 특별한 굴곡이 없었고 자식들도 모두 별 탈 없이 자랐다. 2남 1녀의 삼 남매를 두었는데 모두 대학을 마치고 직장에 다니고 있으니 할 일을 다 한 셈이다.

  그는 퇴직을 하면서 뚜렷한 계획이 없었다. 남아 있는 인생을 어떻게 보낼까 생각했지만 딱히 할 만한 일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렇다고 퇴직 전에 특별히 준비한 것도, 생각해 놓은 일도 없었다. 농협에서 근무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땅을 밟으며 농사를 짓고 싶다는 생각을 무의식중에 하게 되었다.

  그의 고향은 용성면 매남이다. 그곳에는 충무공 이순신의 후손들이 400여 년간 13대에 걸쳐서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다. 그는 일찍 도시에 나와 학교를 다녔고 졸업하자마자 농협에서 인생의 절반을 보냈다. 퇴직을 하고서 부모님이 물려준 고향 땅으로 돌아왔다.

  그해 가을, 그는 천 평에 털복숭아나무를 심었다. 이듬해는 조경수로 벚나무 삼백오십 주를 심었다. 처음 해 보는 일이어서 서툴고 힘이 들었고 생각만큼 수월하지 않았다.

  직장 다닐 때 받았던 스트레스와는 다른 어려움이 있었다. 직장 생활이 정신적으로 힘들었다면 농사는 육체적인 노동의 어려움이 따랐다. 하지만 시골의 한적하고 느긋한 분위기가 퇴직 후 자신이 원했던 생활과 딱 맞아 떨어졌다. 나무를 심고 돌보는 일이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 눈 깜짝할 사이에 일 년이 지나고 이 년이 지났다.

  그는 혼신을 다하여 과일 농사에 몰두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다른 결과가 나왔다. 농사는 이론만으로 되는 것도 아니었고 수십 년 지은 전문가라고 해도 해마다 수확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나무는 말이 없으니 어디가 아픈지 어떤 병에 걸렸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 년 후 복숭아나무에서 약간의 수확을 했다. 자신이 심고 가꾼 나무에서 처음 수확을 하니 기쁨이 가득했다. 복숭아를 따서 주변의 이웃과 친인척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것도 잠시 이듬해가 되자 삼 년생이 된 나무는 키가 커서 관리하기가 힘들어졌다.

  과수 종목 변경을 고민하던 중 우연히 방송을 보게 되었다. 블루베리 농가의 모습이 영상으로 나왔다. 시작 단계라 뜨고 있고 일하기도 쉽다고 하니 한 번쯤 해 볼 만하다고 화면 속의 농부가 말했다. 그는 육체적으로 힘이 덜 들 것 같은 블루베리 농사로 바꾸기로 했다. 농업진흥청에서 재배와 관리하는 교육을 받고 농장 여러 곳을 기웃거렸다.

  복숭아를 베어내고 블루베리 삼백오십 주를 구입해서 화분에 심었다. 똑같은 크기의 화분에 심어 놓은 분재는 새순을 밀어내며 자랐다. 그해 겨울, 하우스 안의 블루베리는 추위를 탔던지 나무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흙을 파서 뿌리를 봤더니 원뿌리가 썩었다. 살릴 수 없을 정도였다. 묘목을 다시 구입했다. 구입한 나무에 퇴비를 밀어 넣은 다음 영양재를 섞어서 다시 심었다.

  가끔 냉해를 입긴 했지만 그럭저럭 나무는 잘 자랐다. 사 년 정도 되자 까맣게 익은 열매가 나뭇가지마다 조롱조롱 달렸다.

  그해, 수백 그램 정도의 수확을 하여 천만 원에 가까운 수익을 올렸다. 농사를 짓고 이 정도의 수입을 올리기는 처음이었다. 처음부터 수백만 원의 돈이 들어갔지만 현금화되어 나오지 않았다. 너무 감격스러웠다. 그것도 잠시, 문제는 이듬해에 일어났다.

  배수 불량으로 인하여 나뭇가지가 마르기 시작했다. 더 두었다가는 나무를 모두 잃을 것 같았다. 마음이 쓰렸다. 그렇다고 그냥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삼분의 이 이상의 나무를 다른 화분에 옮겨 심었다. 이미 뿌리가 상해서 옮겨 심어도 상태는 좋지 않았다.

  묘목을 구입해서 다시 심었지만 겨울이 되자 나무는 또 얼었다. 농사는 나무를 심고 캐내고 또 심고 캐내는 작업이다. 그것은 사람 사는 인생과 별반 다르지 않다. 내년에는 잘 짓겠지, 내년엔 더 많은 열매를 따겠지 하는 각오로 매년 다음 해에 희망의 메시지를 거는 게 농사와 사람의 인생이다.

  그를 만날 때마다 내일 지구의 종말이 와도 오늘 한 그루 사과나무를 심겠다던 스피노자가 생각난다. 블루베리를 심어서 언제쯤 얼마만큼 수입을 얻을 수 있을지 알 수 없지만, 심고 가꾸고 수확하는 그를 보며 지금 이 시간이 그에게 가장 행복한 순간이 아닐까 생각한다.

  초여름이 시작되던 6월 초였다. 비닐하우스 안에서 블루베리를 따고 있는 그를 만났다. 올해는 다행히 추위에 피해가 없다고 한다. 정상적으로 결실이 잘되었다고 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검게 익은 블루베리가 오종종하다. 수확하는 그의 얼굴에 땀이 흥건하다. 일하거리가 있는 노년의 얼굴이 행복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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