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 간판 기술자의 변신

  • 기사입력 2021.12.08 10:04
  • 기자명 김미숙
김미숙
김미숙

   푸름이 짙어 가는 유월, 더위가 조금씩 몰려온다. 사무실 청소를 한 다음 문을 열어 놓고 커피 한 잔을 탄다. 마침 농부 한 분이 사무실 안으로 얼굴을 들이민다.
  실내화로 갈아 신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오는 아저씨가 다리 한 쪽을 절고 있다. 자리에 앉기도 전에 그의 무릎을 내려다보며 다쳤냐고 물었다. 그는 한 달 전에 무릎 관절 수술을 받았다고 한다. 커피 한 잔을 내밀면서 많이 아프시겠다고 했더니 얼굴을 찡그리더니 무리하게 일을 해서 그렇다며 깁스한 다리를 의자에 올린다.
  그는 원래 광고업을 하던 분이었다. 처음에는 조그마하게 일을 시작했지만 얼마 되지 않아서 대기업의 광고를 따냈다. 부산 경남 지역을 대표하는 K기업의 간판 광고였다. 그 후로 일거리가 줄줄이 들어왔다. 광고를 하고 나면 월세를 받는 일도 짭짤했다. 월세를 받고 건물 세를 내고 하청인에게 다시 결제를 해주고도 이익이 생겼다.

  그의 인생에 몇 가지 아쉬운 일이 있었다. 극장에서 하는 광고였다. 영화가 상영되기 전에 하는 미디어 광고판이었다. 개봉관이 수십 개 되는 회사였는데 영화관 광고가 전망이 좋으니 한 번 해 보라고 권했다. 하지만 그는 계약을 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해 보지 않은 일이었기에 덜컥 겁이 났기 때문이었다. 인생을 살면서 세 번의 기회가 온다는데 한 번은 지나간 셈이다.
  그는 형광등 점멸기 특허를 가지고 있다. 자동으로 형광등이 꺼졌다 켜졌다 하는 원리를 이용해서 만든 것이다. 그 특허로 제품을 만들면 대박이 날 것 같았다. 베트남에 사업체를 만들어서 공장을 지었다. 우리나라는 자재비와 인건비가 비싸서 그곳에서 제품을 만들어 우리나라로 수입을 하면 괜찮을 것 같았다. 베트남 정부와 여러 가지 협상을 했지만 서로 맞지 않았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다.
  이듬해 중국에 공장을 세웠다. 인건비가 적게 들었다. 여러 가지 조건도 베트남에 비해서 괜찮은 것 같았다. 하지만 다른 문제가 생겼다. 공장의 외형이 커지면서 인건비와 생산비가 배로 들어가더니 자금 조달이 문제가 되었다. 결국 4년 만에 빈털터리로 귀국을 했다. 우리 나라에 발을 딛는 순간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까 덜컥 겁이 났다.
  그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빈털터리가 되자 삶의 희망마저도 보이지 않았다. 그떼 부동산 컨설팅을 했던 형이 대추밭을 소개해 주었다. 만 평이나 되는 농지였다. 처음 농사를 지었지만 힘들다는 생각보다 오히려 땀 흘리는 노동의 가치를 느꼈다. 그렇게 두 해 농사짓고 나니 자신감이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대추밭 주인이 조카에게 줘야 한다며 땅을 달라고 했다. 너무나 허무했다. 가슴이 답답하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했다. 사업을 하다가 망했을 때도 인생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만 평 되는 대추밭을 하루아침에 되돌려 주고 나니 삶이 너무나 버겁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죽으란 법은 없었다. 주변의 사람들이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다. 농사지으라며 공짜로 땅을 빌려 주기도 하고 농사 짓는 법을 가르쳐 주는 이도 있었다. 그는 빈 땅에 복숭아나무를 심으면서 기술센터에서 하는 교육은 빠지지 않고 들었다.

  땅 한 평 없이 시작했던 농사가 십 년이 지난 지금은 팔천 평이나 된다. 포도 농사 이천 평에 복숭아 농사가 사천 평 되었다. 천이백 평에 콩을 심었고 깨도 천 평 심었다. 몇 년 동안 너무나 어렵게 상상도 하기 싫을 정도로 힘들게 살았다. 아이들이 중·고등학교 다니던 시절이었으니 돈은 없고 그때가 가장 힘든 시기였다.
  농사는 인건비 싸움이다. 사람을 쓰면 인건비로 다 빠져나가기 때문에 가족이 힘을 모아서 일을 해야 인건비라도 남는다. 일꾼을 시키면 차 떼고 포 떼고 남는 게 없다.
  그의 아내는 미용실을 이십 년 경영했다. 단골도 실력도 경험도 쌓였던 아내는 혼자 농사짓는 남편이 안쓰러웠는지 미용실을 처분했다. 사업에 실패하고 힘들어 할 때도 농사를 짓는다고 도와 달라고 했을 때도 아내는 얼굴 한 번 붉힌 적이 없었다. 오히려 무릎 수술한 남편 걱정을 했다. 오늘도 아내는 뜨거운 땡볕에 나가서 콩 적심을 하고 있단다.

  농사지은 지 어느새 십 년이 되었다. 강산도 변한다는 십 년, 많은 것이 바뀌었지만 그에게 농업의 열악한 환경은 여전하다. 먹고살기 위해서 시작한 농사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얼마 전에는 공무원이었던 친구가 퇴직한 후 할 일이 없어서 일거리를 찾고 있었다. 그는 서슴없이 농사를 시작해 보라고 했다. 몸은 고달프지만 시간 하나는 정말 잘 간다며 노후에 가장 좋은 놀이터라고 했다.
  정오가 되자 그의 아내에게서 전화가 온다. 점심 식사하러 오라는 호출이다. 오전 내내 그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부부가 서로 아끼고 배려하는 마음을 느낀다. 농사는 부부가 함께 지어야지 혼자서 짓기는 어렵다. 절뚝거리며 사무실을 나가는 그를 향해 나는 소리친다. “아저씨 얼른 나으세요. 밭에 일하러 가셔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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