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산전설의 전승현장과 변이양상

“전설은 지역민들의 애환이 현장중심으로 남아 전승되는 삶의 스토리!”

  • 기사입력 2017.12.18 11:27
  • 최종수정 2017.12.18 11:30
  • 기자명 김종국 기자


  ① 구화리와 사랑바위

  (화자의 구연)
  예로부터 구화리에 잣은 화재가 일어남으로 주민모두가 불을 두려워하였다.
  마을 주민들은 그 원인이 마을 앞에 우뚝 솟은 산이 있기 때문에 화마가 멈추지 않는다고 여겼다. 그로부터 어느 날(조선시대)부터 화마를 피하기 위하여 마을 앞에 큰 나무를 심어 화마로부터 재앙을 피하고자 하였다. 또한 마을 앞산에 큰 바위를 ‘흰둥바위’라 하고, 마을 뒤 능적골의 검은 바위를 ‘검둥바위’라 하여 이들을 남녀 사랑바위라 하였는데, 앞산 흰둥바위 앞에 가려진 나무를 베면 마을 아낙들이 모두 바람이 나 달아난다 하였다(김주영, 83).

▲ 흰둥바위가 자리한 마을 앞산

  구화리 흰둥바위의 줄거리를 설화적 화소로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발단부)
  ① 옛날부터 마을 앞에 큰 산이 있었다.
         a        b        c

  (전개부)
  ② 그 산이 마치 화산처럼 생겨 마을에 화재가 잦았다.
        d             e            f         g
  ③ 또 산 중턱 큰 바위에 나무가 없으면 마을 아낙네가 바람이 났다.
           h         I          j             k            i
  ④ 주민들이 산을 가리기 위해 마을 앞에 큰 나무를 심고 지당을 팠다.
        l             m            n           o             p
  (결과부)
  ⑥ 그로부터 화재는 잦아들고 마을 아낙네도 진정되었다.
         q      r       s             t         u
  위의 19개 화소를 설화적 관점에서 다음과 같이 분류할 수 있다.

  ⓐ 배경화소 ~ 시간화소 <언제> 옛날부터. 
                공간화소 <어디서> 구화리.
  ⓑ 주화소 ~ 인물화소 <누가> 마을주민, 아낙네
              사건화소 <무엇을> 화재, 바람.
  ⓒ 종속화소 ~ 종속화소 <어떻게, 왜> 나무를 심고, 지당을 팠다.
  ⓓ 증시화소 ~ 증시화소 <지금도 있다는 증거> 잦아들고, 진정되었다.

  위에서 시간화소를 주목하면, 전설이 시작될 때 “a는 옛날”가 선두에 있으며, 본격적으로 전개될 때 “c의 큰 산이”이 선두에 있다. 장면이 전환될 때 “d~g의 마을 화재”로 시작하며, 이 종속화소로 “h~j"rk 삽화됨으로 마을 아낙네가 바람이 난다로 고정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여기에느 “i의 바람이 났다는”는 주화소의 필수화소가 된다.
  그런데 “m~p” 화소는 장면전환 구실을 하며, 본 전설에서만 통용되는 특수사건화소이다. 그러므로 ‘구화리 흰둥바위’전설에서는 보편 종속화소로 “o”를 들 수 있고, 보완화소로 반드시“p”가 삽화되어야만 설화적 완성 형식을 갖추게 된다.
이를 화소별 설화적 관점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발단부)
  ① 옛날부터 마을 앞에 큰 산이 있었다.
     (산의 형국과 큰 산의 역할 부여)

  (전개부)
  ② 그 산이 마치 화산처럼 생겨 마을에 화재가 잦았다.
     (산의 형국과 사건전개 모티프 삽화)
  ③ 또 산 중턱 큰 바위에 나무가 없으면 마을 아낙네가 바람이 났다.
     (사건화소를 보완하는 특수화소 삽화)
  ④ 주민들이 산을 가리기 위해 마을 앞에 큰 나무를 심고 지당을 팠다.
     (사건화소에 대한 처방 →풍수적 비보 활용)

  (결과부)
  ⑥ 그로부터 화재는 잦아들고 마을 아낙네도 진정되었다.
     (비보→ 소응적 의미부여)

  이는 앞산이 마치 화산 형국이라 마을에 잦은 화재의 원인을 산의 형국에 따른 풍수지리설에 기인하게 되면서 마을 암에 큰 나무를 심어 이를 차단함으로 불의 기운을 사라지게 하였고, 이에 비보적(裨補的) 의미로 본래 마을 형국이 구불구불하다하여 구불리로 하였던 것을 불을 구화리(仇火  里)라 개칭하였고 이로서 마을 내 화재가 자재되고, 마을 아낙네들의 바람기가 진정되자 훗날 구부리(求富里)라 하였다는 지명유래(경상북도 지명유래총람, 1984)가 이를 증빙하고 있다. 이러한 전설의 전승 양상은 전국적 광포전설로, 용성지역만 해도 소재지 앞에 우뚝 솟은 용산의 형국을 두고 그 앞마을과 오목천변에 마주 보이는 일대에 마을 숲을 조성하고 지당을 팠다는 사실 등은 곧 풍수지리설에 의한 비보적 행위가 전설로 변이된 것이라 할 수 있다.

▲ 옛 구화리(현 용천리) 일대 마을 숲 조성 흔적

  여기에는 어떤 형국에서 발생 가능한 사건을 미리 비보함으로, 이후에 닥쳐올 사건을 해결할 수 있다는 의미를 부여한 것으로 여기에는 반드시 소응(所應)이라는 풍수적 논리가 뒤따르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 풍불의 형국 → 화의 대상 →비보 →소응이 일어났다.
  ⓑ 마을주민들의 여망 → 자연의 이치를 활용 →순응적 현상 발생

  이 전설의 변이양상은 다분히 자연의 이치를 순리적으로 대응함으로 이로서 화를 면할 수 있었다는 설화적 요소가 가미된 전설로, 여기에는 구화리와 인접한 능적동(지금은 능적지) 물한동 지명과도 이와 상응하는 설화가 전승되고 있다.
  물한동(勿寒洞)은 1592년 4월, 임진왜란 발발 시 자인현역의 의병대장으로 이 땅을 지켜온 최문병 선생의 “성재선생실기”에 의하면, 4월 22일 여기 구룡산 아래 물한동으로 피난하여 그날로 함께한 10여명과 뜻을 모아 창의를 결심, 도처에 통문을 보냈던 곳이다.
당시 물한동(勿寒洞)은 능적골 안에 숨겨진 선생의 정신적 고향으로, 선생의 부친 동지중추부사 최식 선생이 돌아가셨을 때와 선생의 모친 경산 전씨가 별세하였을 때 이골에 여막을 짓고 3년간 시묘하였고, 이후 백형이 별세하였을 때도 3년간이나 복을 대신하였던 곳이 곧 물한동(勿寒洞)이다.
  당시는 자인현이 경주부에 속해 있어 본부의 명령을 듣지 못하였던 터라 선생은 평소 자신이 정신적 고향인 구화리(仇火里) 물한동(勿寒洞)을 가장 안전한 창의장소로 결정하고, 선영이 있는 능적골에 재궁에 뜻을 함께한 지역 선비와 함께 사방에 통문을 보내었던 자인현역의 의병창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선생은 자신의 출생지 울옥동에 창고의 곡식을 왜적에게 빼앗기기 전에 여기 물한동(勿寒洞)으로 옮겼고, 자인향교의 공자 위판(位版)도 함께 문중 재궁으로 옮겨 모셨다 하였다.

▲ 전 물한동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초막

  여기에 등장하는 물한동 지명 또한 당시 구화리에 속하였던 지역으로, 능적동제방 끝자락에 마을 숲을 조성 하듯 작은 지당(池塘)을 막고, 골 안을 물한(勿寒)이라 고쳐 영천 최씨가 재궁(齋宮)을 축조하면서 지칭되었던 지명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현재는 일대가 느티나무 군락으로 활용되고 있다.
  전 물한동 일대는 현재 모두 9필지의 전답 위에 느티나무 묘목이 식재되어 있으나, 요소요소에는 당시에 축조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우물과 재궁터, 선생이 시묘하였다는 여막흔적, 현재까지 남아 있는 초막 한 동이 세월의 무게를 이고 서 있는 듯 격세지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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