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황실의 시조, 대조영의 후손

‘太氏’ 집성마을 경산 송백리

  • 기사입력 2014.02.20 18:26
  • 최종수정 2014.02.25 08:48
  • 기자명 장석화 기자

발해황실의 시조, 대조영의 후손,
‘太氏’ 집성마을 경산 송백리

 
  송백리는 경산 남천면에서 자인 · 용성 방향으로 경산의 진산인 선의산으로 배산임수를 이룬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마을엔 20여가구 25명정도의 영순태씨 후손들이 살고 있다.

  이곳 마을 사당의 위패는 조선 중종 때 춘추관 편수관을 역임한 대중상의 29세손인 태두남이다. 그런데 이곳에 태두남의 위패와 함께 발해의 1대고황제 대조영의 영정이 봉안되어있다.

  ※ 발해 왕 계보 : 1대 고황제 - 2대 무황제 - 3대 문황제 - 5대 성황제 - 6대 강황제 - 7대 정황제 - 8대 희황제 - 9대 강황제 - 10대 선황제 - 11대 장황제 - 12대 안황제 - 13대 경황제 - 14대 해황제 - 15대 애황제

 
 

  이 마을은 바로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의 직께 후손들이 거주하는 전국 유일의 영순태씨 집성촌이기 때문이다. ‘대씨 · 태씨 중앙종친회’는 2006년 대조영 영정제작 추진위원회(위원장 태석배 종친회장)를 구성하고 얼굴학 연구가 조용진 박사, 발해사 연구자인 송기호 서울대박물관장, 한규철 고구려발해학회장, 김민지 발해복식연구가, 김은국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원을 고증위원으로 위촉했다. 제작에는 권희연 숙명여대 회화과(한국화전공)교수가 맡아 선현정부표준영정지정 제86호로 등재됐다.

  한편, 표준영정원본은 서울대 박물관과 이곳 송백리 사당에 봉안되었다. 사본은 속초시립박물관의 '발해역사관'에 보관중이다.

  우리나라의 태씨는 발해의 전신인 진국(震國)을 세운 대중상을 시조로 한다. 대중상은 고구려의 유장으로, 그의 아들 대조영과 함께 고구려가 멸망한지 28년후인 696년, 고구려의 고토(故土)였던 지금의 중국영토 지린성 옌볜조선족자치주 돈화시 현유진 동모산에서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를 세웠다. 대중상이 사망하자 대조영은 2년뒤 국호를 발해로 고쳤다.

  발해는 이후, 229년간 15대 태왕이 재위했으며,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한 동방의 대제국으로 군림했다. 926년 발해제국은 거란족에 의해 멸망하고, 발해의 마지막 태왕이던 대인선(애황)의 태자였던 대광현은 934년 수만 여명의 유민을 이끌고 고려로 귀화했다. 이에 태조 왕건이 934년, 태씨성을 내려주어 태씨 가문이 생성되었다.

  태씨의 본관은 크게 협계와 영순으로 나뉜다. 협계태씨는 현재 전북 임실과 옥구 등지에 살고 있는데, 정유재란때 남원성 전투에서 애군과 싸우다 대부분 순절해 후손이 많지않다고 한다. 영순태씨는 대중상의 31대손인 태순금 일족이 1592년 임진왜란시 경북 문경시 영순면에서 경산시 남천면 송백리로 이주하여 지금까지 살고 있다.

  협계 태씨와 영순 태씨 족보는 다른 족보와 달리 발해의 기원, 발해 왕세약사, 지리와 강역, 관제와 문물, 외교문서, 연표, 대씨가 태씨로 변하게된 사실 등 발해와 태씨의 역사를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학계에선 발해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될 뿐 아니라 중국의 동북공정을 무너뜨릴 중요한 사료이며, 이 마을 주민은 살아있는 증거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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