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회 압량주 군주 및 구국 무명용사 숭모 추모제 봉행

  • 기사입력 2020.11.18 22:57
  • 기자명 김종국 기자
▲ 제6회 압량주 군주 및 구국 무명용사 숭모 추모제 봉행
▲ 제6회 압량주 군주 및 구국 무명용사 숭모 추모제 봉행

  제6회 압량주 김유신 군주 및 구국 무명용사를 숭모(崇慕)하는 추모제(追慕祭)가 지난 11월 3일 오전 10시, 신라 삼국통일의 전초기지(前哨基地) 소재인 경산시 압량읍 마위지(馬爲池) 근린공원 임시 제단에서 경산문화를 사랑하는 뜻 있는 각계의 지역 인사 10여 명(종교별 : 기독교 2, 불교 3, 천주교 2, 유교 3명)이 자발적인 헌금(獻金)으로 참례(參禮)한 가운데 엄숙히 봉행 되었다.
  이날 제의는 초헌관에 김윤근(85, 관란서원 원장), 아헌관에 정호완(77, 전 대구대학교 교수), 종헌관에 박승표(69, 자인면번영회 회장)이 헌관을 맡고, 집례와 대축은 최용석(76, 원당최씨 종친회장)씨가 각각 소임하였다.
  이 밖에도 참례자로는 성기중(경산학회 회장, 정치학박사), 김종운(법률상담소, 법학박사), 류상열(전 강북경찰서장), 선웅스님(선광사 주지), 김종국(자치신문 문화부 국장) 등이 헌작(獻爵)하였다.

  압량주는 신라 선덕여왕 11년(서기 642년)에 선덕여왕의 명에 의해 지금의 경산지역을 압량주라 명명하고, 김유신 장군이 군주(軍主)가 되었다.
 《삼국사기》권 제41, 열전 제1. 김유신 상편에 의하면, 신라의 관문성인 대야성이 640년 백제군에 의하여 함락되자, 이에 선덕여왕이 구 압독국 도읍지를 압량주라 명명하고 장군 김유신을 군주로 보냈으나, 압량인들은 아무도 그를 환영하지 않자 김유신은 마치 군사에 아무런 생각도 없는 것과 같이 술을 마시고 풍악을 잡히며 달포를 지내니, 고을 사람들이 유신을 용렬한 장수로 여겨 비방하기를“여러 사람이 편안히 있는 지 오래되어, 한번 싸워볼 만한 여력이 있는데, 장군이 게으르니 어찌하면 좋은가!”하였다. 유신이 이 말을 듣고 비로써 압량주 백성들이 가히 쓸 수 있음을 알고 대왕에게 고하니 왕이 이에 허락하였다 하였다.
  김유신 장군은 압량으로 돌아와 그들을 주병으로 뽑아 조련하여 적진을 향해 나갔다 기록하였다.
  2년(644년) 후 김유신 장군은 대장군으로 승차(陞差)하고, 동년에 압독주 도독(都督)이 되었다. 결국 김유신 도독 휘하의 압량주(押梁州) 주병(州兵)은 신라 화랑들과 더불어 645년에 대야성을 탈환하고 이로써 신라 삼국통일의 대업의 주역으로 역사의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하지만, 통일 이후 이들에 대한 보상은 아무것도 없었다.

▲ 경주 통일전에 소장된 삼국통일 영광도
▲ 경주 통일전에 소장된 삼국통일 영광도

  이에 대하여 최근 경산학회(회장 성기중)는 지난 10월 23~24일 양일에 걸쳐“경산 압량주의 삼국통일 역할과 정체성”을 주제로 학술 세미나를 하고 압량지역의 3개 병영유적과 인근 경주·영천시와 청도군의 신화랑체험 벨트사업 조성 현장과 군위 제동서원 효령사 등을 답사하고 경산지역의 삼국통일 위상 정립과 역사적 재조명 등을 주장한 바 있다.
  이날 제의에 참석한 성기중 회장은,“무엇보다 당해 지역민들이 얼마나 지역문화에 관심이 있느냐가 지역문화 창달의 관건이다.”역설하며, 신라 삼국통일과 압량주병의 위상 또한 우리가 챙기고 가꾸어 나가야 할 과제라 강조하였다.
  이에 정호완(전 대구대학교 사범대학장) 교수는‘압량주는 경산의 모태요, 경산의 역사적 상징이다’라고 역설하였다.                 
하지만 파제(罷祭) 후 참례자 전원은 다음 해(2021년)에 이어질 제의를 걱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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