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가까이 오지마 

  • 기사입력 2022.10.26 20:28
  • 기자명 이다은
이  다  은
(사)한국국보문인협회 산악회장
제33호 동인문집 '내 마음의 슾' 자문위원

  이국땅에서 20년 만에 고국에 돌아와 엄마를 만난 딸의 첫 마디가 황당했다. “엄마 가까이 오지 마” ‘피는 물보다 진하다.’ 고 했는데 무엇이 우리 모녀의 행복을 갈라놓는가? 
1979년 10월 13일 새벽 7시 포항기독병원에서 첫 딸을 출산했다. 남편은 포항종합제철(포스코) 안전 주임으로 근무할 때다. 병원에서는 꽃다발과 축하금 50만 원을 주면서 병원비도 받지 않았다. 태어날 때부터 효녀 짓을 한 딸이다. 

  포항에서 대구로 올라와 남편은 직장을 여러 번 옮기면서 가정에도 충실하지 못했다. 여러 날 집에 돌아오지 않던 어느 날 이상한 꿈에서 깨어났다. 무덤 안에 있는 관 속에 사람이 반듯이 누워 있었다. 내가 남편인 것을 확인하는 순간 백옥같은 하얀 천이 덮이더니 서서히 하늘로 올라가는 꿈이었다. 아무리 꿈이라지만 너무도 생생하고 남편은 부재중인 터라 불길한 예감마저 들었다. 다시 눕지도 못한 채 안절부절못하며 무릎을 꿇고 이 무슨 뜻인지 기도하고 있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김00 씨 댁입니까? 낯선 남자로부터 신원을 확인하는 전화가 왔다. 놀라지 마세요. 김00 씨가 심장마비로 돌아가셨습니다.” 맑은 하늘의 날벼락이었다. 그렇게 남편은 사춘기에 접어든 남매를 두고 영영 돌아오지 않는 강을 건넜다.

  나는 5남매 막내로 태어나 부모님을 일찍 잃었다. 남편마저 적금통장 하나 없이 떠나 보내고  외로움과 가난을 친구처럼 삼고 살았다. 딸은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으로 떠났다. 딸이 떠나는 날 공항까지 가지도 못하고 동대구 역에서 이별했다. 남편의 빈자리를 지켜 주던 딸마저 떠나니 모든 것을 잃은 듯한 서러움에 참았던 눈물이 발목에 뚝뚝 떨어졌다. 사회 초년생이 지인도 없는 이국땅에 빈손으로 가서 고생할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은 엄마이기에 겪어야 할 서러움의 보상이었다.

 딸이 미국으로 떠난 지 20년 만에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얄궂은 운명이 찾아왔다. 코로나가 확산 되면서 미국 전역을 휩쓸었다. 헤어디자이너인 사위의 미용실도 결국은 문을 닫게 되었다. 코로나가 장기전을 벌이자 그동안도 여러 번이나 한국에 돌아오고 싶었던 딸이 이때를 빌미 삼아 적극적으로 사위를 설득시켰다. 다행히 코로나 상황 중에 미국 체류자들에 대한 규제가 완화되어 항공권을 쉽게 구할 수 있어 미국 생활을 정리하는데 가속도가 붙었다.

  딸이 한국으로 돌아온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기적이었다. ‘호사다마’라고 하더니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인천공항에서 리무진을 타고 집 앞에 내리는 딸의 첫 마디 “엄마 가까이 오지 마” 엄마를 홀로 두고 떠났던 딸이 돌아오는 날은 내 생애 최고의 기쁜 날인데 이 무슨 날벼락인가! 달려가서 딸을 부둥켜안고 실컷 울고도 싶고 기뻐 춤도 추고 싶은 심정인데 그런 엄마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팔을 벌리며 다가가는 엄마를 가까이 오지 말라고 하니 청천벽력 같았다. 
딸은 무거운 케리어를 끌고 혼자 집으로 들어가고 드라마 같은 한 장면을 보내고 힘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미국 시민권을 가진 사위가 공항에서부터 따로 격리되어 어디론가 알 수 없는 곳으로 실려 갔기에 더욱 맥이 풀렸다.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코로나로 인한 정부방침에 대한 야속함을 삭이고 있는데 갑자기 생기 나는 딸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마 엄마 빨리 사위 데리러 가 응?” 사위가 올 수 있대? “응- 말 잘해서 집에 올 수 있게 되었대” 그 말을 듣는 순간 힘이 어디서 그렇게 생겼는지 야 하며 벌떡 일어나 자동차 열쇠를 빙빙 돌리며 급히 차를 몰고 주소지를 향했다. 그곳은 청주에 있는 어느 교육연수원이었다. 두 시간을 달려가니 병풍처럼 펼쳐진 아름다운 청주호가 손짓했다. 자연을 좋아하여 혼자서도 여행을 즐기던 내게 오늘은 청주호의 아름다움도 내 마음을 낚아가지 못했다. 공항에서 헤어진 딸과 사위가 새로 마련한 집에서 함께 자가격리를 할 수 있다는 기쁨의 자리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두 주만 지나면 사랑하는 내 딸을 부둥켜안고 20년 동안의 회포를 풀며 실컷 울어라도 보고 싶은 심정뿐이었다. 

  네비게이션이 안내 해 준 건물에 들어서니 마스크를 낀 경비원 두 명이 굳은 표정으로 다가왔다. 사위는 큰 가방 두 개를 앞에 두고 한 개는 둘러맨 채 초췌한 모습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서로 말을 아끼면서 두 시간 만에 보건소에 도착했다. 입국 24시간 내의 항체검사 결과 사위와 딸, 모두 음성판정을 받았다. 그런데도 자가격리를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두 주간은 2년보다 더 길었다.

  코로나는 우리 일상을 망가뜨리며 많은 상처와 후유증을 남겼다. 아직도 꼬리를 완전 내리지 않았지만, 딸이 고국에 돌아와 그림 같은 단풍을 보며 가을의 정취를 만끽하게 된 것이 벌써 2년이지났다. 하루가 멀다 하고 엄마를 찾는 딸의 목소리를 들으면 지금도 가슴이 벅차다. “누구 딸이야? 엄마 딸” 서로 쳐다보며 미소짓고 손잡고 다니는 지금이 참 좋다. 어떤 날은 앞서 걷는 딸의 뒷모습을 보며 꿈인지 생시인지 감격의 눈시울을 적시며 가슴이 촉촉해지기도 한다. 이제 딸을 마음껏 안을 수 있어 좋다. 음성만 들어도 내 딸이기에 그냥 좋다. 코로나가 막아놓은 어두운 장벽이 안개처럼 사라지고 소소한 행복이 찾아왔다. 하나님! 이 행복 오래오래 지켜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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