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출근길 

  • 기사입력 2022.11.17 10:53
  • 기자명 수필가 김미숙
김미숙
수필가
김 미 숙

 “엄마 출근 준비 다 했어요?” 나는 매일 아침 엄마한테 출근 준비 다 했냐고 전화를 한다. 전화를 받은 엄마는 내 차 앞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빨리 내려오란다. 같은 아파트 다른 동에 살고 있는 엄마와 나는 출근 시간이 같다. 
  팔십이 코앞인 엄마는 세금과 의료 보험을 떼는 공무원으로 일을 한다. 아침마다 직장인처럼 옷을 갖춰 입고 얼굴 단장도 예쁘게 하고 나온다. 내가 근무하는 곳으로 가는 길에 엄마의 직장이 있다. 매일 만나서 출근하는 우릴 보고 자매냐고 묻는 사람도 있다. 그때마다 나는 웃음으로 대답한다. 
  엄마는 학교에서 일을 한다. 학교에 도착한 엄마가 하는 일은 작업복을 갈아입고 청소하는 일이다. 오전에 몇 시간 청소하는 일을 하지만 아이들에게 좋은 할머니 역할도 한다. 싸우는 아이들을 말리는가 하면, 쓰레기를 줍거나 인사를 잘하는 아이들에게는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아이들은 엄마의 팬이다.    가끔 아이들로부터 감사의 편지도 받는다.   
  수십 년 전 초겨울, 마흔아홉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셨다. 엄마와 어린 오 남매가 걱정되었던지 아버지는 쉽게 눈을 감지 못했다. 심장이 멎은 뒤에도 눈을 뜨고 계셔서 엄마가 아버지의 뜬눈을 손으로 덮어드렸다.  
  엄마는 해방둥이였다. 광복이 되던 해에 태어나서 6.25가 터지던 해에 초등학교 입학만 하고선 학교에 다니지 못했다. 북한군이 기습적으로 동네까지 침공함으로써 엄마는 학교와 멀어졌다. 열아홉에 아버지를 만나 혼배를 올린 후 자식을 낳아 키우느라 애당초 엄마의 삶은 없었다.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신 후 엄마의 삶은 엄동설한의 하루하루였다. 겨울의 한 복판에 서서 옴짝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혹독했다. 엄마는 세상 물정 모르고 아버지와 오 남매 뒷바라지만 하면서 살았다. 까막눈이었던 엄마에게 세상은 버티고 살아가기엔 너무나 잔인했다. 
  엄마는 아버지를 잃고 슬퍼할 겨를이 없었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 다섯 개의 도시락을 싸 놓고 자식들 입에 풀칠하기 위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했다. 우리 오 남매를 굶기지 않기 위해서 동분서주 움직였다. 더군다나 글자를 모르는 엄마가 할 수 있는 일은 공사판과 식당이 전부였다. 남자도 힘든 아파트 공사판에서 무거운 벽돌을 등에 메고 날라야 했고 생선을 이고 길거리를 기웃거렸다. 엄마는 지난한 삶의 무게를 견디며 참고 또 참으면서 묵묵히 일을 했다. 삶은 고단한 계단이었다. 오르고 올라도 끝이 보이지 않는 나선형 계단이었다. 
  우리 오 남매는 엄마의 억척같은 삶을 보면서 자랐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땟거리가 없어서 굶는 날이 허다했지만 엄마의 헌신적인 자식 사랑에 한 번도 절망을 품지 않았다. 엄마는 오로지 희망을 붙들고 살았다. 그렇게 살았던 엄마 얼굴은 늘 맑은 날이었다. 흐린 날은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긍정적이었다. 
  나이가 들면서 우리는 한 명씩 결혼을 했다. 아무것도 못해준 엄마는 가슴이 미어졌다. 하지만 딸 넷을 결혼시킬 때까지 한 번도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딸들에게 엄마 품에서 잘 떠나간다고 덩실덩실 춤이라도 출 기세였다. 그런 엄마의 모습은 낙천적이어서 가능했다.   
  막내인 남동생의 결혼식이 끝나고 엄마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동안 참았던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딸 넷을 시집보낼 때는 한 번도 보이지 않던 눈물이었다. 혼자서 오 남매를 다 키워 떠나보냈으니 숙제를 다 끝냈다는 행복한 눈물이었다. 
  엄마는 어느 날 학교에서 일하다가 교실 안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아이들이 공부하는 모습에 행복한 마음이 들었다. 그 옛날 6.25가 터져서 학교에 다니지 못한 아쉬움을 공부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달랬다. 하지만 하루가 지나고 한 달이 지나고 일 년이 지나도 그 공허함이 채워지지는 않았다.  
  가을이 깊어가던 어느 날, 엄마는 글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구사에서 칸 공책 여러 권을 사 오셨다. 거기에 글자를 써 달라고 하셨다. 나는 엄마 이름과 동생들, 손자 손녀 이름을 노트 맨 윗자리에 적어서 드렸다. 일주일 걸려서 노트 한 권을 빽빽하게 그려 오셨다. 나는 노트에 ‘참 잘했어요.’ 스티커를 붙였다. 엄마는 다른 노트를 내밀며 또 적어 달라고 하셨다. 이번에는 주변의 꽃과 나무와 사물의 이름을 적었다. 또 일주일이 걸렸다. 비뚤비뚤 쓴 글자는 지렁이가 굴러가는 것 같았고 새가 날아가는 그림을 그려왔다. 
  엄마는 수십 년 동안 까막눈으로 살았다. 글공부가 마음대로 되지 않아서 주저앉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한 번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글자를 쓰는 손에 힘이 가해져서 팔이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방금 읽었던 글자도 돌아서면 잊어버리기 일쑤였다. 
  엄마는 오전에 출근을 해서 일을 하고 오후에 친구들을 만나러 나갔다. 땅거미가 짙어질 무렵, 집으로 들어와 저녁을 해 드시고는 또 글자를 그렸다. 하루도 쉬지 않고 텔레비전도 끈 채 읽고 쓰고 반복했다. 그러구러 여러 날이 지났다. 하루는 우리 집에 와서 아이들이 읽었던 동화책을 달라고 하셨다. 한 권씩 한 권씩 가져가신 동화책은 엄마의 집에서 또 다른 친구가 되었다.  
  엄마는 매일 동화책을 읽고 글자를 따라 썼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내가 눈을 떴다. 내가 심봉사처럼 눈을 떴어.”하시면서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소리 없이 흐르는 이슬방울이 엄마의 눈에 대롱대롱 달려있는 모습에 나도 코가 시큰거리면서 눈물이 쏟아졌다. 지금껏 아픈 곳 없이 옆에 있는 것만도 감사한데 동화책까지 줄줄 읽으면서 즐거워하는 엄마가 자랑스럽다. 매일 아침 엄마가 들려주는 동화를 들으면서 나는 엄마와 행복한 출근길을 맞는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