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산에도 왕비가 태어났다.

  • 기사입력 2015.07.27 22:10
  • 최종수정 2015.07.27 22:51
  • 기자명 김종국

  
  경산은 고려 말 왕비의 고향이었다.
  고려 공양왕의 왕비 순비 노씨는 경산사람이다.
  - 경산시 옹산골에 그 흔적을 찾아가본다 -

 
  경산시 중산동 산 4-2번지선 옹산(甕山)골에 소재한 의열공(懿烈公) 노영수(盧穎秀) 묘역(墓域)은 예부터 노정승(盧政丞) 묘로 전승되고 있는 고려시대 전형적인 경산지역의 최고 세도가 묘역이다.

  또한 이 묘역이 자리한 지금의 경산시 중산동(당시 옹산골) 일대는 고려 말 공양왕(恭讓王)의 왕비(王妃)를 배출시킨 고장으로, 공양왕비 순비(順妃) 노씨가 어린 시절 여기 옹산골에서 증조부 노영수로부터 훈육을 받으며 고려국 국모(國母)의 자질을 키웠던 곳으로 알려지고 있다.

  의열공 노영수 묘역은 고려국이 몰락하면서 불안한 정국(政局)의 소용돌이 속에 경산에 세거하던 그의 후손들이 전국에 각지로 뿔뿔이 흩어짐으로, 한 시대 화려했던 노영수공의 일가도 그 권세에서 막을 내릴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하게 됨으로 이후 묘역은 훼손되었고, 특히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이를 두고 고려국의 왕비족묘역이라 하여 일제에 의해 크게 훼손되는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고 한다.

  본 묘역은 1779년, 후손들이 현재의 선영 일대를 보수하던 중, 문화시중 의열공이란 명문(銘文)이 새겨진 지석(誌石)을 발견하면서 가까스로 묘역은 수습(收拾)할 수 있었으나, 당시에 조성된 석물은 심한 훼손으로 수습하지 못한 채 이후 후손들의 여력에 따라 문인석 등 6점의 석물들은 1779년 이후부터 복원 하였던 것으로 전하고 있다.

  그 중 묘역 앞에 배치된 4점의 문인석은 그 조형기법이나 복제양식에서 전면에 배치된 2점의 석인은 고려 양식이나, 배면에 2점은 각각 조선 중기 양식을 따르고 있어 그 조성 시기가 분명하지 않으나 그 조성 기법에서 전면에 놓인 2점의 문인석은 각각 고려 양식을 따르게 하였고, 배면에 배치된 2점은 각각 둥그스름한 볼기짝에 입체감을 둔 조선중기의 조각 양식과 묘사기법은 시대를 초월하였다.

  또한 본 석상은 전면과 측면에 세련미를 가감하였으나, 배면에는 단조로운 마감 기법을 시도함으로 그 묘사에 섬세함 보다 고졸미가 있고, 수백여 년 동안 묵묵히 경산이 왕비의 고향이라는 그 흔적을 지켜주고, 오늘 날까지 그 묘역이 고려말기에 조성된 노영수공의 묘역이라는 확증을 보태어 주고 있다는 점에서 의열공 노영수 묘역은 잊어져가는 《고려사》속에 경산문화를 재조명하는 중요한 사료적 가치가 충분하다. 그것은 그 속에 고고학적 근거보다 대를 이어 이 땅을 지키며 살아온 옹산골 사람들의 스토리가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한 시대의 역사적 사실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경산시 중산동(옹산골), 고려 공양왕비 순비 노씨 증조부 의열공 노영수 묘역

  또한 지금까지 전승되는 《고려사》 등 10여점의 문헌에서 경산이 왕비 순비가 태어난 고향이라 하여 공양왕이 어명으로 경산을 현에서 군으로 승격시켰다는 경산건치 연혁의 기록에서 경산이 왕비의 고향이라는 점은 이론의 여지가 없는바, 이의 유일무이한 현장적 자료로 의열공 노영수 묘역은 당시의 역사적 사실을 증빙하는 중요한 자료가 아닐 수 없다.

  본 묘역은 건좌손향(乾坐巽向) 지지로, 상단에는 말년에 그가 돌보았던 부친의 묘를 두고, 그 아래 넓은 상석을 중심으로 고려시대의 전통 묘제 양식을 가미하였다는 데서 고려시대의 전통적 효 사상을 엿볼 수 있다.

  특히, 묘역 주변을 지키고 서있는 문인석이 전면 2점은 각진 관모를 쓰고, 후면 2점은 곡(曲)진 관모를 쓴 석인(石人)으로, 각각 다른 시대를 가늠하고 있지만, 이 묘역에 대한 조선시대의 폐해(弊害)와 수난의 역사를 가늠하는 사료적 가치를 부가하고 있다.

  현존하는 묘역의 석물은 전면에 망주석, 장명등, 묘비, 상석, 제단석, 향석, 차광막 고리석과 더불어 사방 1점씩 석인(石人)을 배치하였다. 이는 각기 재질이 화강석임에도 마멸 상태가 완만하고 선각(線刻)이 뚜렷하며, 석인(石人)의 경우 관모와 홀의 양식에서 4점 모두가 문인석으로 확인되고, 이들의 관모와 관복의 복제 형식은 시대가름을 분명히 하였다.

  중산동 옹산골, 고려 공양왕비 순비의 증조부 의열공 노영수 묘역에 설치된 문인상

  전면에 배치된 2점의 문인석은 평면에 감실을 판 듯 한 마애 형식의 조형기법을 활용한 것으로, 그 묘사는 섬세함 보다 윤곽이 뚜렷한 것이 특징이다. 또한 배면에 배치된 2점의 문인석은 선각에 볼륨을 둔 조선중기 이후의 형식으로, 앞의 고려말기의 전형적인 조형 양식과는 차별화 하였다는 점이 돋보인다.

  이와 같은 시대 가늠은 각기 문인석의 복제(服制) 양식과 관모, 그 밖의 화강암의 마모와 개별 표현양식에서 조성시대를 가늠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열공 노영수 묘역의 문인석은 당시의 복제양식과 조형성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여 지며, 특히 인체 묘사에서 고려시대의 경직함과 조선시대의 해학적인 면을 동시에 가미하였다.

  또한 개별 석상에서 전면(前面) 2점의 문인상은 눈을 크게 뜨고 전방을 주시한 형상임에 반해, 배면(背面) 배치된 2점의 문인석은 눈을 지그시 감은 채 고뇌에 찬 형상으로 그 묘사기법에 대한 작가의 의도가 주목되기도 한다.

  이는 당시 시대적 상황과 무덤의 주인공과의 관계를 고구하는데 중요한 사료적 가치가 있을 것으로 사료되며, 본 묘역은 경산지역의 향토지는 물론 《고려사》와 《영남읍지》, 《동국여지승람》, 《조선환여승람》등에서 순비 노씨와 관련하여 그의 고향을 명확히 하였다는 점과 교하노씨 세보에 수록된 순비 노씨의 증조부 묘소가 경산시 중산동 옹산골에 존치한다는 점 등을 감안, 고려 왕비의 고향 경산에 대한 지명고와 위상정립을 재조명하는 방안으로 주변 환경 및 여건과 친화할 수 있는 적절한 보존책과 문화재적 가치의 평가가 주목되기도 한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저작권자 © 경산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