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행문] 팔순 노익장, 수필가 못잖은 우리 문화 답사기

경상북도 청도군 금천면 신지(薪旨) 섬마리 기행

  • 기사입력 2023.02.14 01:00
  • 기자명 천기찬_성균관 전의 
천기찬(86) 성균관 전의 
천기찬(86) 성균관 전의 

  본 기고문은 올해로 86세에 이른 지역 유림의 원로이신 천기찬 성균관 전의(典儀)께서 청도군 금천면 신지리 선암서원과 연접한 고택을 답사하고 적은 기행문을 소개한 것이다.

▲ 선암서원(仙巖書院)과 동창천 일대
▲ 선암서원(仙巖書院)과 동창천 일대

  경상북도 청도군 금천면 선암로(仙巖路)에서 선암서원(仙巖書院) 이정표를 따라 왼쪽 고샅길로 들어선다. 

  먼저 서원(書院)으로 가는 길에 눈길을 사로잡는 어마어마하게 높은 큰 곰방대(짧은 담뱃대), 그 높이만도 무려 36m나 된다니, 세상에 태어나 9순을 바라보기까지 처음 보는 광경이다.

  여기 곰방대를 중심으로 꽤 넓은 부지에 조성된 신지생태공원은 동창천(東倉川) 일대에 소요하는 4㎞의 생태탐방로는 어릴 때 보았던 그 정취로 남아있다.

  그 공원길을 따라 문득 발길을 멈추게 하였던 그곳에는 박훈산 시인의 보릿고개 시비(詩碑)가 세워져 있었다. 유난히도 배고팠든 그 시절, 왜 그렇게도 못살았고, 배는 왜 그리 고팠는지, 하지만 지금 아이들은 ‘밥 없으면 라면이라도 먹으면 되지’하고 핀잔만 준다. 

  박훈산 시인(詩人)은 1919년, 청도(淸道) 섬마리에서 태어나 1946년부터 국제신보에 시집을 발표하면서 문학활동을 시작하였고,6.25 한국전쟁 때 공군예속 종군문인단원으로 활동하면서 조지훈. 유치환 같은 문인들과 교류하였다고 했다.

  호젓한 소나무 숲 오솔길 따라 더 들어서면, 선암서원(仙巖書院)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선암서원은 소요당(逍遙堂) 박하담(朴河淡)과 삼족당(三足堂) 김대유(金大有)를 배향(配享)하는 곳으로, 소요(逍遙)하여 즐거움을 깃들이니 마침내 이 집을 소유당(逍遙堂)라 하였다 했다.

  박하담은 김대유와 함께 일찍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창고(倉庫)를 짓고 곡식을 모았다는데. 그 창고가 동창(東倉), 그 아래 넓고 깊은 내는 동창천(東倉川)이 되었다니 인걸(人傑)은 간데없고 동창만 푸르구나. 

  조선시대 무오사화(戊午史禍)에 이 하천 물길이 사흘이나 핏빛으로 역류하였다는데, 세월 따라 살다 보니 무심한 동창천은 오늘따라 밑바닥까지 거울 같다.

  이 서원(書院)은 본래 1568년에 청도군 매전면에 향현사(鄕賢祠)로 창건되었다가, 1577년(9년 후) 군수 황응규(黃應奎)가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는데 1868년, 흥선대원군의 전국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878년에 박하담(朴河談)의 후손들이 선암서원(仙巖書堂)으로 당호(堂號)를 고쳐 중창하였고, 서원 뒤편 큰 바위 아래 깊은 소(沼)는 선호(仙湖)라고 붙여졌다.

  선암로를 따라 고택(古宅)이 가득한 밀양박씨 신지[섬마리] 마을은, 박하담이 세상을 떠난 후 이 마을의 역사는 그의 후손들이 이어오며, 임진왜란 때는 밀양박씨 후손 중 14인의 의사(義士)가 의병을 일으켰고, 당시 창의(倡義) 의병(義兵)들은 모두 부자(父子)·형제(兄弟)·사촌(四寸)지간이다. 

  그들 중 천성만호(天城萬戶) 박경선(朴慶宣)은 전투 중 한쪽 팔목이 잘려 나가자 적장을 끌어안고 어성산(漁城山)의 절벽 봉황애(鳳凰崖)에서 동창천으로 몸을 던졌다고 한다. 

  선암서원에 임란창의의사 전적비는 이들을 기리는 것으로 비석 뒤편으로 보이는 동창천변의 단애(斷崖)가 공 봉황애이다. 

  이 마을(섬마리)에는 선암서원을 위시하여 약 40여 동의 기와집이 즐비하게 늘어섰는데, 신지리는 청도에서 고택이 가장 많은 마을이라고 한다.

  선암로 양쪽으로 운강고택(雲岡古宅), 도일고택(到一古宅), 섬암고택(剡巖古宅), 운남고택(雲南古宅), 명중고택(明衆古宅) 등이 줄줄이 이어진다. 

  여든여덟 칸이란 운강고택은 박하담의 서당 자리에 운강(雲岡) 박시묵(朴時默)이 1824년에 중건한 집이라고 한다. 운강고택의 건물구조는 솟을 문에서 남북으로 직사각형 대지에 약 60m로 쭉 뻗어 중문과 건물 동수, 문들은 모두 폐쇄하여 답사를 못 하였다. 

  도일고택은 운강의 동생인 박기묵(朴기默)이 1899년 합천군수로 있을 때 건축한 것이고, 섬암고택은 운강의 둘째 아들인 박재소가 분가하면서 건립한 집으로 운남고택은 운강고택을 가는 선남로변에 셋째아들 박재충의 집이며 명중고택은 운강의 손자인 박래현이 별서(농막)로 건립된 건물이라 했다. 

  이 고택들은 모두 19세기에 지은 것으로 고졸미(古拙美)는 적지만 당당하고 깨끗한 풍모에 소담스러운 맛이 없지 않다. 

  또 금천교 천변에는 운강이 조선 철종 7년에 세웠다는 아름다운 만화정(萬和亭) 눈길을 끌었다.

  명포길을 지나 임당리 운림고택(雲林古宅)을 찾아가는 길목에 임당(林塘)은 숲과 깊은 소(沼)가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하였다.

  이 일대에는 본래 임당(林塘)과 명포(明浦) 두 마을이 있었다는데, 1914년에 임당으로 합병(合倂)되었다 하며, 임당리의 운림고택(雲林古宅)은 선남로변에서 약 30m 골목길로 들어서면 5칸 규모의 솟을대문이 나타나고 다시 담장이 길게 이어져 있다. 여기에 고택들은 조선 후기 궁중(宮中) 내시(內侍)로 정3품 통정대부에 올랐던 김일준(金馹俊)이 낙향하여 건립한 집이라 하여 지금까지도 내시 고택, 김씨 고택으로 불리고 있다.

  건물구조는 솟을 문을 가운데로, 우측에 방 2칸 좌측에 헛간 1칸과 또 1칸은 1m 높이로 말죽통이 달린 마구간이 붙어 있고, 마당에 들어서면 마당 좌측에 5칸의 사랑채는 내시들 거처로 외부 손님들은 안채로 들어가지 못하게 통제되어 있고, 사랑채는 손님을 접견하는 사랑방 및 거실 방 3개와 창고 2칸이 축조되어 있었다. 

  또한 우측 담장 밖에는 사당이 있고, 다시 중문으로 들어가기 전 중문채 우측에 접한 사람 키 높이의 판벽으로 된 바람막이가 있는데, 여기에 하트(♡) 모양으로 구멍이 3개 뚫려있고, 다시 중문으로 들어가면 중문채의 구조는 우측으로 방이 2개 좌측으로 디딜 방앗간 1칸과 허드레로 사용하는 헛간 1칸이 있다.

  안채 5칸 중 정침(正寢)의 구조는 오른쪽으로 부인들이 거처하는 거실 방 3개가 나란히 연결되어 있고, 왼쪽에 부엌(정지) 2칸과 안채에서 바라보면 우측에 고방채가 5칸이고, 그 옆에 재래식 화장실이 붙어 있었다. 

  정침(正寢)은 □자형의 배치를 이루고, 이 안채는 모두 건물과 담장으로 폐쇄되어 있어 여기에 사랑채 크기의 엄청난 고방과 담장으로 폐쇄되어 있으므로 안채에 기거하는 사람들은 이 중문으로 드나들게 되어있다.        

  1988년 3월, 이 집의 사랑마루 밑에서 한지로 된 폭 7㎝ 길이 70㎝ 크기의 두루마리가 나왔는데, 이는 내시 첨지 김병익의 가세(家世)로, 이는 임진왜란 직전 청도에 들어온 내시 가문의 족보였다. 그 속에는 400여 년간 16대에 이르기까지 성(姓)이 다른 양자(養子)들의 이름과 이들이 매장된 장소가 적혀져 있었다.

  이 같은 가계(家系)의 부인들은 친정 부모가 사망하였을 때만 연락을 받고 바깥출입이 허용됨으로 내시(內侍) 가족으로 들어온 며느리들은 이로써 바깥 구경을 할 수 있다고 하였다.

  중간 문 채는 중문 옆에 사람의 선(立) 눈높이의 판벽에 하트(♡) 모양의 구멍이 3개 뚫려있다. 이 구멍은 내시의 삶 그리고 그들 부인의 삶을(평소 생활) 엿볼 수 있게 하는 부분이다.

  내시제도는 1908년 대한제국 시대에 폐지되었다.

  운림고택의 가계는 김문선(金文宣)에 이르러 직첩(職牒)만 받고 내시 생활은 하지 않았으며, 18대 이후에는 정상적인 부자(父子) 관계가 이뤄져 가계를 이어오고 있다.

  -글 양매(陽梅) 천기찬(千基燦)♣       


  위 기행문은 조선시대 명나라의 조병 영양사로 임진왜란 당시 원병으로 참전한 무신 천만리(千萬里)의 후손인 전 자인향교 전교이자 현 성균관 전의(典儀)이신 양매(陽梅) 천기찬(86세)님이 지난 2022년 12월 25일 경산시 남계와 연접한 청도군 금천면 신지리 일대 선암서원과 고택을 직접 답사하시고 현장과 문헌을 통해 본인이 느낀 점을 망라(網羅)한 문화유산 답사기이다.(본문의 내용은 본지의 공식적 입장과 다를 수도 있음을 밝혀둔다. -취재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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