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_3월, 달빛 걸음 

  • 기사입력 2023.04.05 12:48
  • 기자명 장순덕
장  순  덕2013년《문학세계》시 부문 등단2016년《영남문학》수필 부문 등단제7회 전국문학인 꽃축제 수상영남문학 제1회 송암문학상 수상(사) 영남문학예술인협회 이사
장  순  덕2013년《문학세계》시 부문 등단2016년《영남문학》수필 부문 등단제7회 전국문학인 꽃축제 수상영남문학 제1회 송암문학상 수상(사) 영남문학예술인협회 이사

  3월은 죽은 땅에서 생명을 잉태하는 달이다. 깡마른 대지에서 연초록 물기를 뿜어 올리고 겨우내 무심한 졸가리에 제각각 색깔의 꽃등을 매달아 놓는 달이다. 2월 영등바람을 헤쳐온 매화의 산달을 받아 그 맑고 고운 향기를 들녘에 해산하는 달이다. 겨울의 찬 기운과 봄의 부드러운 기운을 아우르는 길목의 달이고 화합의 달이다. 겨울에서 봄의 문턱을 여는 경계선이다. 해서 꽃이 피었다고 봄을 품어 안기에는 아슬아슬한 모험을 염두에 두는 달이다. 내가 연모하는 이의 변죽이 이 같을까 싶다. 봄날같이 나긋하여 마음에 들어왔다 싶어 덥석 마음에 품으면 쭈뼛 토라져 차갑기가 마른 풀잎에 깔린 서리 같다.

  3월 중순의 남매지의 물빛은 푸름과 뽀얀 봄의 기운을 반반씩 받고 있다. 왕버들, 범무늬억새, 오색궁중연, 은빛왕갈대는 아직도 마른 머리를 세우고 있다. 못 둘레를 돌아가며 드문드문 서 있는 산수유는 노란빛으로 만개한 꽃술을 활짝 펼치고 있다. 어린나무라 가지를 펼치고 있는 모습이 하늘 향해 두 팔 벌린 열 살 소녀의 발랄하고 여리여리한 품새다. 못 동쪽 산야에는 물오른 매화꽃이 흐벅지게 흐드러지고 더러는 꽃잎이 떨어져 군데군데 가지 끝이 슬거워져 있다.

  왕버들 개지는 새끼손가락 굵기의 꽃눈을 뜨고 까칠한 솜털로 햇볕을 쬐고 있다. 개나리는 어제까지 병아리 부리만큼 벌린 봉오리를 오늘은 활짝 화관을 벌리고 오가는 눈길을 붙잡는다. 못 둘레길을 오가는 사람들이 많이 늘었다. 봄기운이 완연한 것 같다. 그러나 아직은 변덕스러운 날씨라 차림새가 겨울옷을 입고 산책하는 사람도 가끔 보이기도 한다.

  내일모레가 음력 2월 보름이다. 달 한쪽이 손가락 굵기 차이로 미세하게 떨리지만, 만월과 진배없다. 정월의 대보름달보다 나는 오히려 2월의 보름달이 친근하고 편한 느낌이 든다. 이팝나무 졸가리 사이로 휘영청 보름달을 올려놓고 한참을 바라보았다. 달과 친숙하기로는 나뭇잎이 다 떨어진 지금이 제격이다. 가지 사이로 들여다보다가 가지 끝에 백색의 불두화처럼 올려보기도 하였다. 달은 내 눈높이에서 올랐다 내렸다 하며 내 마음을 아는 듯 환하게 웃어주는 것이었다. 가지 사이로 보이는 달빛은 아직 겨울 냉기를 잘라내지 못한 탓인지 파르스름한 한기가 은장도의 칼날 같다. 허공에 솟아있는 둥근 달은 청신함이 군더더기가 없다. 차갑고 깊이가 있어, 그 맑음이 도심의 조악한 불빛을 제압한다. 달을 두고 버스를 타고 오면서 생각에 잠겼다.

  내가 스물여섯쯤이었을까. 남편은 세 살배기 아들을 두고 생계를 위해 사우디아라비아에 돈 벌러 갔다. 나는 멋모르고 남편을 덜컥, 열사의 나라에 보냈다. 처음 두어 달은 또 멋모르고 아이와 시간을 보내느라 그럭저럭 바쁜 나날을 보냈다. 하루는 꽤 늦은 저녁에 잠을 자려고 자리를 깔았다. 문간방이었다. 큰 창호지 미닫이문이 있었고 창문을 열어젖히자 맵싸한 한기가 먼저 들이쳤다. 바로 앞에는 동백꽃이 물기 흐르는 짙은 초록 잎 속에서 붉게 꽃을 달고 있었다. 달빛을 받은 동백꽃은 그 붉음이 한층 요염해 보였다. 그때 마침 달빛은 대문 위 옥상 장독대 위로 눈부시게 내리비추었다. 

  지금 생각하니 아마 2월 보름달 같았다. 나는 그날의 기이한 상황을 잊을 수 없다. 달빛은 점점 빛을 내며 장독대에 눈처럼 하얗게 깔리고 있었다. 파르스름한 청잣빛이 비릿한 살 냄새를 뿌리는 것 같았다. 나는 얼른 창문을 닫았다. 어디서 야수가 발톱을 드러내고 금방이라도 창호지 문을 뚫고 달려들 것 같았다. 기이하게도 무섬증 보다 이글이글한 야수의 눈에 갇히는 느낌이었다. 몸을 휘감는 어떤 불가항력의 힘은 나를 꼼짝없이 근육의 모든 힘을 빼버렸다. 그 밝기가 가슴을 뚫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혼절했다. 얼마쯤 지났을까 장단지 뚜껑 여는 소리에 깨어났다. 집주인이 늦은 시각에 된장을 담으러 온 것이었다. 다행히 나를 살려 준 구세주 소리 같았다. 

  지금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때의 상황은 어쩜 잠재의식에서 야수가 나를 납치하여 주기를 바랐었는지도 모를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몸을 풀어헤쳐 산산이 다 드러내고 싶은 충동 같은 것이었다고 나름대로 결론 내렸다. 달빛은 그런 초자연의 힘을 끌어들여 나의 신심을 산산이 해체시킬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IMF가 닥쳤다. 하던 식당이 적자가 쌓이고 결국 많은 빚을 지고 문을 닫았다. 사방에서 빚 독촉을 받고 결국 아파트를 팔고 시골로 이사 왔다. 우연히 동향집인 안방에 큰 창문이 있고 달빛이 그대로 방안에 들어왔다. 고단한 육신을 방안에 뉘면 아무리 괴롭고 힘든 일이 있어도 행복하였다. 환한 그 밝음이 나의 모든 슬픔을 녹여주는 것이었다. 달빛은 담백하다. 차가우면서도 목을 시원하게 적셔주는 이른 아침의 약수다. 깨끗하기가 옥잔에 떠놓은 옥로玉露같다. 마음에 고통을 일시에 낫게 해주는 영험한 약손이다. 어느덧 그렇게 달은 나와 뗄래야 뗄 수 없는 동반자로서 나의 삶에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3월 하순, 삼동을 조심조심 건너온 남매지의 봄은 물빛도 한층 맑아졌다. 사람들의 걸음걸이도 여유로워졌다. 꽃샘바람이 몇 번 훑고 지났지만, 개나리가 노란 꽃등을 치렁치렁 매달고 줄지어 섰다. 목련 봉오리는 합장한 부처님 손이다. 곧 품 안의 새들을 함박웃음으로 정토의 세계로 날려 보낼 태세다. 도롯가에서 군데군데 온통 꽃으로 매단 목련은 나뭇가지에서 눈부신 웃음을 머금고 있다. 보살의 넉넉한 얼굴이다. 겨울은 반드시 봄이 온다. 겨울을 넘어와 언 밭을 헤치고 생명을 여는 3월의 봄. 어느덧 황혼을 바라보는 나의 인생도 꽃샘바람에 흔들려도 당당하게 지족하는 한 그루의 나무였으면 좋겠다. 음력 2월의 만월처럼, 누구나 우러러 품어주는 여낙낙한 보살의 모습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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