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잔도에서 만난 남자

  • 기사입력 2023.04.29 09:47
  • 기자명 김미숙
                                             김미숙
                                             김미숙

  중국의 천문산에 올라 출렁거리는 잔도 길을 걷고 있다. 봄이 한창인 천문산은 갈맷빛 천지다. 유리를 깔아놓은 잔도 바닥으로 발아래가 투명하게 보인다. 천 길 낭떠러지에 눈이 멈추자 현기증이 날 것 같다. 발밑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조심조심 발걸음을 내딛는다. 남편의 손을 잡고 앞만 보고 걷는다. 얼마나 걸었을까. 잡았던 손을 놓고 걷자고 한다. 나는 현기증이 나서 발아래를 내려다보지 못하고 저 멀리 산의 풍경만 보고 걷는다. 한참을 걸었을까. 사람들 틈으로 남편이 보이지 않는다. 

  목을 길게 빼고 그의 모습을 찾는다. 천문산의 몽밀한 풍경에 시선을 빼앗기는 사이에 남편이 나를 앞질러 갔다는 생각에 이른다. 사람들 틈 사이를 헤집고 빠른 걸음으로 나아간다. 한참을 걷다 보니 세 곳으로 갈라진 모서리길이 나타난다. 어디로 가야 할지 망설인다. 남편이 이곳을 지나갔다면 분명히 나를 기다렸을 텐데. 보이지 않으니 뒤에서 오는 게 분명하다.

  길모퉁이에서 남편을 기다린다. 갓 길 위에서 잔도공들이 새로운 길을 만들기 위한 작업을 하고 있다. 그들은 여기저기서 각자가 맡은 일로 분주하게 움직인다. 한 남자가 허리에 끈을 칭칭 묶고 손에는 밧줄을 잡고 낭떠러지로 내려간다. 그의 몸이 밧줄에 매달려 대롱거린다. 마치 묘기를 부리는 것 같다. 나는 내려다보는 것만으로도 어지럼증이 느껴진다. 절벽 아래에 몸이 매달린 채로 남자는 커다란 기계로 바위를 뚫는다. 그 소리는 대단하다. 산 전체가 흔들리는 것 같다. 

  바위가 어느 정도 뚫렸는지 뚫린 구멍으로 쇠 파이프를 끼우고 1m 떨어진 옆으로 옮겨서 다시 구멍을 뚫는다. 그는 잔도를 만들기 위해 기초 뼈대를 만드는 중이다. 절벽을 타고 흔들림 없이 일하는 남자의 모습이 아찔하다. 

  생명을 담보로 줄 하나에 매달려 땜질을 하고 있는 남자의 얼굴이 번들거린다. 갈퀴보다 마디가 굵고 더 거친 손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친다. 절벽에서 목숨을 걸고 일하는 모습이 아찔하다. 그가 의지하는 것은 엉덩이에 앉은 널빤지와 밧줄이 전부다.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는 책임감 때문은 아닐까. 

  많은 사람이 생업에 매달리는 건, 책임질 가족과 미래를 담보로 잘 살기 위함일 것이다. 책임져야 하는 가족이 있기에 그 끈을 부여잡고 있는지도 모른다. 산다는 것은 가족을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도 내놓는 일이라는 생각이 인생의 절반을 지나고 나서야 깨닫는다.  

  남편도 마찬가지다. 일 년 내내 전국을 떠돌며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는 책임감으로 잠시도 쉴 틈이 없다. 이제까지 살면서 우리가 했던 일은 한 번도 쉽다고 느낀 적이 없었다. 남들이 쉽게 다가설 수 없는 힘들고 어려운 일만 우리에게 돌아왔다.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이 시작했으니 잘 살아보겠다는 책임감으로 살아왔다. 외줄에 몸을 맡기며 새로운 길을 내는 남자나 전국을 떠돌며 농사용 자재 판매를 하는 남편도 결국은 가족을 위해서 살아온 것이다.  

  잔도공 남자의 손놀림은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 기초 뼈대가 완성된 곳에 콘크리트를 치고 지지대로 바닥을 설치한다. 그 동작은 순식간이었고 바로 유리를 까는 작업으로 마무리된다. 

  남자는 어깨와 허리에 묶여있던 줄을 느슨하게 풀면서 오늘은 할 일이 끝났다고 한다. 그때 저 멀리서 눈에 익은 남자가 어기적어기적 걸어오고 있다. 얼굴은 하얗게 질린 채 몸은 녹초가 되었다. 순간 콧등이 시큰거린다. 잔도 길 위를 걸어오는 그를 향해 손을 흔든다. 

  남편 얼굴이 구슬땀으로 번들거리고 온몸이 기진맥진하다. 그것도 모르고 천리 낭떠러지가 보이는 잔도를 나 혼자 달려온 것이다. 결혼을 하고 강산이 세 번 바뀌었건만 같이 살면서 배려 없이 살아왔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그건 나 혼자만의 생각일 수도 있을 것 같다. 남편이 고소공포증이 있다는 것을 기억도 못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아이들이 어렸을 적 설악산으로 여행을 간 적이 있었다. 2박 3일간의 여행이었다. 흔들바위를 마지막으로 여행을 끝내기엔 울산바위가 부르는 것 같았다. 울산바위를 반쯤 올랐을 때였다. 남편이 꼭대기까지 올라갈 수 없다며 고소공포증이 있다고 그때도 힘들어했었는데 나는 이제야 기억이 났다. 

  이순을 넘긴 지금 살아왔던 길을 뒤돌아본다. 우리 부부는 이제까지 잔도 길처럼 구불구불하고 걷기 힘든 위험한 인생길을 걸어왔다. 그때마다 삐걱거리지 말고 잘 걸어가자고 발을 맞췄다. 이제는 봄날의 연둣빛 풍경을, 가을의 붉은 단풍을 여유롭게 보면서 걷는다. 잔도 위에서 잠시 헤어졌다 만난 남편이 반갑다. 다시 잃어버릴까봐 조바심이 난 나는 남편의 손을 잡는다. 천문산 여행이 끝날 때까지 아니, 인생 끝나는 날까지 손을 놓지 않고 걸어가자고 힘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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