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합리적인 삶과 행복경제 이야기

  • 기사입력 2023.06.11 20:26
  • 기자명  박천익 (대구대학교 명예교수)
                                     대구대학교 명예교수 박천익
                                     대구대학교 명예교수 박천익

  인간은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바람직스런 삶을 사는 것일까? 합리적인 삶을 사는 것이다. 합리적인 삶이란 곧 이치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을 말한다. 삶과 죽음을 어떻게 관리하느냐 하는 문제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궁극적인 과제이다. 사람은 평생을 산다고 해도 대략 100壽이면 만점이다. 철학자 김형석 교수처럼 더러 백수를 넘는 사람들도 있지만, 200살, 300살 등으로 특별히 장수를 하는 사람은 없다. 옛날 중국에서 256세(1677~1933년)를 살았다는 리청유엔(이청운)기록도 있으나 자료의 신뢰성이 약하다. 최근 카스피해의 아제르바이젠 공화국에서 168수를 살았다는 기록이 있지만, 그래봤자 200壽 미만이다. 정작 인생에는 삶의 질이 중요하므로 사실 무작정 오래 살았다고 부러워할 일 만은 아니다. 복되게 살아야 한다.

  복되게 사는 것은 무리 없이 현명하게 사는 것을 말한다. 무작정 오래살기 보다는 인생을 얼마나 가치 있게 그리고 어떻게 멋지게 사느냐가 더욱 중요한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의 수명을 나이와 비교하여 분석한 최근의 자료에 의하면, 대략 70세 생존율은 86%, 75세 생존율 54%, 80세 생존율은 30%, 85세 생존율 15%, 90세 생존율 5%로 조사되었다. 75세의 생존율이 54%이니 대체로 현재 퇴직 제도를 고려하면, 정년퇴직 후 10년 남짓 살 확률이 약 절반 정도는 족한 셈이다. 80세 생존율이 30%, 90세는 5%이니 90세 이상을 살면 5% 이내에 드는 장수 우등생인 셈이다. 현실적으로는 죽음은 인생의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을 말한다. 

  인간은 종교라는 의식체계를 만들어 삶과 죽음의 고통을 피하고자, 기상천외한 믿음의 세계를 만들어 내세 또는 사후 세계를 얘기하며 삶을 위안해 보지만, 사실은 죽음으로 인생의 모든 것은 끝난다. 즉 죽음으로 인생의 모든 것은 끝나며, 다시 생시와 같은 실존적 생명활동은 없는 것이다. 종교는 죽은 후의 극락, 천국, 영생 등을 얘기하지만 사실상 종교인들이 말하는 그런 현세 같은 내세는 없다는 것이 통설이다. 그러므로 죽음은 인생의 모든 것의 끝을 의미한다. 다른 모든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육신도 죽고 나면 자연속의 일부가 될 뿐이다. 죽은 육신을 화장을 하던, 매장을 하던 그 어떤 형태로 처리할지라도 종국에는 한 줌의 흙과 티끌로 변할 뿐이다. 만약 질량불변의 법칙에 따라 인간의 육신과 영혼이 우주공간 어디에 흩어져 한줌의 흙처럼, 구름처럼 남는다 해도 그것은 이미 우리 인간의 실존적 사고와는 다른 별개의 존재일 뿐이다. 

  그곳에서 나를 찾는 그 어떤 의도 된 행위도 그건 단지 헛된 행동일 뿐이다. 우주공간에 남아 있는 티끌 같은 영육의 찌꺼기에 대해서는 한 톨의 미련도 기대도 있을 수 없다. 죽음 이후의 존재에 대하여 그 어떤 기적도, 기대도, 미련도 갖지 않는 것이 현대를 사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삶의 바른 자세라는 생각이 든다. 따라서 살아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현실에서 나의 삶을 어떻게 관리하느냐가 중요한 문제이다. 현실이란 곧 살아있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삶에 대하여 바른 성찰이 필요하다. 행복한 삶을 살아야 한다. 행복은 참된 마음가짐과 합리적인 생활 속에서 실현된다. 지나친 욕심은 오히려 자신의 행복을 감소시킨다. 지나친 욕심으로 자신의 이름을 더럽히는 어리석음의 죄를 짓지 않은 것이 합리적인 삶의 자세이다.

  세상의 이치를 따라 순리대로 살며, 남과 나를 균형 잡힌 사고로 이해하고, 남과 함께 즐겁게 살아가기 위한 겸손한 자세를 취하는 것이 옳다. 스스로의 처신에 도를 넘는 과분함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지나친 소유욕과 권세와 명예에 집착하는 삶은 합리의 道를 벗어나는 부질없는 것이다. 일찌기 공자는 아침에 도를 깨달으면 저녁에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했다. 또한 성경은 부자가 천국가기는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기보다 어렵다고 얘기했다. 인생은 베품이고 남과 공생하는 것이며, 그렇게 하여 남과 더불어 생을 즐겁고 보람 있게 살아가는 것이다. 무엇이든지 가진 자가 조금씩 양보하고 절제를 해야 한다. 돈을 가졌든, 권세를 가졌든, 명예를 가졌든 그 무엇을 가졌든 간에, 가진 자가 특별히 겸양하고 너그러워야 세상이 보다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이다. 

  모든 일에 과함은 금물이다. 합리적인 생활을 통한 지나침이 없는 행동이 필요하다. 처신의 왕도는 겸손이 바탕이 된 낮고 부족함에 있다. 나이가 들수록 더욱 겸손함이 더욱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나이가 들수록 베푸는 마음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든다. 조금 부족한 듯 식사를 하고, 조금 부족한 듯 수수하게 살고, 내 욕심을 줄이고, 남을 생각하는 마음의 여유로움에 행복이 자리한다. 책임 있는 자리에 앉을수록 자신의 자리 때문에 생길 수 있는 오만을 경계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정치란 바르게 하는 것이지만 그 내면에는 어느 시대나 세력 싸움이 불가피한 것이다. 특정 정파를 과하게 지지한다거나 다른 정파를 지나치게 혐오하는 의식 자체는 이미 中庸의 道를 지나치는 경우가 많다. 역사에 충신들이 과도한 정치가들의 헛된 욕심 때문에 얼마나 억울한 희생했는지를 기억해야 한다.

  나이가 들수록 되도록 스스로의 욕심을 버리고 국가와 사회 그리고 이웃을 생각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사랑하는 내 후손과 국민이 사는 이 나라, 이 사회, 이 지구촌이 좀 더 복되고 살기 좋은 사회가 될수 있도록 나의 미약한 힘이나마 보태는 삶을 살고자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자신이 이 세상에 살고 갔다는 좋은 흔적으로 남아 후세가 기억하는 가장  보람 있는 삶이 될 것이다. 삶의 위대함은 세상의 지위가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마음자세에 있다. 그가 평소 생명을 어떻게 생각하고, 남을 어떤 시각으로 보고 있는가가 중요한 행복의 원천이 될 것이다. 생명을 아끼고 귀하게 생각하는 마음에서 인간의 위대성이 있다. 마음이 항상 낮은 곳에 임하며, 그 어떤 보잘 것 없는 삶일지라도 한 생명으로서의 삶을 존귀하게 생각하는 태도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의 위대함은 세상의 물질이나 지위가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의 크기 문제라는 생각을 해 본다. 

  행복을 결정지우는 경제는 합리성을 준수해야 한다. 합당한 방법으로 적당한 돈을 벌고, 행복에 지장을 초래하지 않는 합리적인 경제관리를 해야한다. 매사를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중심 있는 삶에서 행복이 깃든다.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는 은애의 마음이 삶의 높이를 결정한다. 그런 면에서 세계 4대 성인은 가장 위대한 사람으로 평가 받는다. 여기서 우리는 "한 사람의 영혼이 우주보다 무겁다"는 파스칼의 성찰을 새롭게 새겨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의 삶의 깊이는 단순한 수명 보다 몇 갑절 존귀한 생명인식의 자세가 어떠냐에 달려 있다는 생각이 든다. 현실에서 행복의 실현은 이런 모든 사고체계를 담은 합리적인 생활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합리적인 사고에 의한 행복경제의 실현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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