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취재 2] 경산지역 임란창의는 경북의병사의 금자탑이다.

  • 기사입력 2016.02.01 13:04
  • 최종수정 2016.02.01 13:08
  • 기자명 김종국 객원기자


  ◐ 경산현(慶山縣)편

  1592년 4월, 임란발발 당시 지금의 경북 경산시의 행정구역은 고산, 안심지역을 합한 3개현 11개의 행정구역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구 경산현은 현 경산시의 7개동과 압량면, 고산면(현 대구시 편입) 일대로, 경산시의 소재지 중심구역이다.
  지형지세는 동으로 자인현과 남으로 선의산, 서로는 대덕산, 북으로는 길게 뻗은 오목천이 남쪽에서 흘러내리는 남천과 금호강이 합류하고, 중앙에 성암산, 고산, 자산이 현의 행정구역과 경계하고, 서쪽에는 담티고개가 대덕산과 연결하여 현 대구광역시와 경계하고 있다.
  본래 경산현(慶山縣)의 남쪽 경계는 청도군(淸道郡)의 모태인 옛 이서국(伊西國)과 소국 당시 국경을 이룬 지역으로, 이 성현은 이서국의 잦은 압독국(押督國) 침입으로 압독국이 이를 지켜내기 위하여 그 경계지점의 고개를 남성현(南省峴)이라 붙였다는 지명유래와 그 아래 마을의 지명을 하루에도 세 번씩이나 성현을 살피라는 뜻에서 삼성리(三省里)라 불렀다는 지명유래 등을 미루어, 이 지역은 예부터 외부로부터의 침입이 잦았던 곳이라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이러한 지형지세는 곧 현의 남쪽지역이 외부와의 경계에서 취약한 지형이라는 점을 잘 대변해 주는 것으로, 1592년 임란발발 시에도 왜적의 침입이 현의 남쪽 지점에 집중되었던 것이다. 이는 최응담(崔應淡)의 회당실기(晦堂實紀)와 그의 유허비에 의하면, 동년 5월에 경산현령이 남쪽에서 왜적이 침입하자 겁에 질려 도망가자, 당시 안심 반계동에서 창의한 최응담이 수백의 의병을 거느리고 경산에 도착하니, 현민들은 현청에 현령과 병사가 없자 그를 대장(代將)으로 추대하였다 하였다. 이와 같은 기록으로 보아 당시 경산현의 수령은 왜적의 침입과 동시 관아와 현민들을 버리고 도망하였던 것이 기정사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어디에도 경산현의 수령이나 관군이 왜적과 싸웠다는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민들은 현령의 일련의 행위와는 달리 스스로 향토수호를 위하여 의병을 창의하고, 왜적과 대항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 왔다.

  경산 삼의정의 초계 정씨 삼의사 유허비에 의하면, 고려 말기, 한 때 경산에 유배된 것이 연분이 되어 경산시 상방동에 은거한 양헌 정연(鄭?)의 후손인 정변함(鄭變咸), 정변호(鄭變頀), 정변문(鄭變文)등 삼종(三從)이 창의하자, 동년 6월 2일 반계동에서 출정한 최응담이 이들과 합세하여 그들로부터 대장으로 추대되었다 하였다.

표 1-2. 경산현 의병항쟁도

  이때 성현(현 남성현)에 왜적이 침입하여 노략질 등 양민을 괴롭히자, 때를 같이하여 고산에 박응성(朴應成)과 더불어 명망 높은 선비 진섬(陳暹), 진엽(陳曄), 남중옥(南仲鈺), 전락(全洛), 승적(承迪), 등과 합세하여 복병으로 표 1-1과 같이 적을 크게 무찔러 적 30여급을 베고, 말 10필을 노획하였다. 또 다시 금곡(지금의 남천면 금곡리)에 왜적이 출몰하여 싸워 크게 이기고, 적의 군수품을 노획하였다. 연이어 왜적 수백이 자인현역에서 쳐들어온 것을 남천면 삼성리 연화봉 아래에서 괴멸(壞滅)시켰다 한다.

  이 때 화산군에서 권응수(權應銖)가 의병을 일으키자 정대임(鄭大任)이 영천에서, 신해(申海)가 하양에서, 홍천뢰(洪天賚)가 의흥에서, 최문병(崔文炳)은 자인에서 창의하였다. 초유사 학봉, 김성일은 정세아, 곽희근 등의 진정에 따라 박진(朴晉)을 대신하여 권응수를 의병대장으로 열읍이 그의 지휘를 따르게 하였다.

  경산현 의병대장 최응담(崔應淡)은 1564년 지금의 대구시 동구 율하동에서 태어났다.
  그의 초명은 대기(大期)이고, 호는 회당(晦堂), 본관은 흥해인(興海人)이다. 그는 경산현 의병대장으로 경산현에 침입하는 왜적을 명망 높은 지역선비 박응성(朴應成), 진섬(陳暹), 진엽(陳曄), 남중각(南仲珏), 전락(全洛), 승적(承迪), 정연(鄭?)의 후손 변함(變咸), 변호(變頀), 변문(變文) 등과 함께 경산의병들과 합세하여 적을 크게 물리쳤으며, 이후 영천 좌도의병장 권응수의 요청으로 최응담은 여러 의병장과 더불어 의병 3,500여명을 모아 와촌면에 집결하였다. 이때 군사는 3부로 나누어 하양현의 신해(申海) 의병장, 자인현의 최문병(崔文炳) 의병장이 좌우총이 되고, 최응담 대장은 후독장이 되었다. 당시 왜군 수만이 영천에 주둔하고 있어 군수 김윤국이 별영장, 정세아 정담은 참획종사로서 적을 화공하기로 계책하였다.

  이때 최응담과 권응평, 홍천뢰는 의병 500을 거느리고 적 수십 급을 베어 선제공격을 하니, 때마침 동남풍이 크게 불어 아군이 불을 지르자 왜적은 감히 성문 밖을 나오지 못하였고, 이로서 아군이 용전하여 성벽을 지키는 왜적을 베니, 적은 북을 두드리며 고함을 치며 성안으로 숨었다. 이로서 수많은 왜적을 무찔렀다. 그 후 영천성이 복구되자 군사를 정비하여 삼려(三閭)에 이르니 적 수백이 갑자기 어디서 나타났다. 그는 말을 몰아 활을 쏘고 적 대장 평의훈(平義訓)을 베었다. 이 소식을 들은 자인현에 주둔한 왜적이 밤새 도망쳐 경주에 주둔한 왜적과 합세하니 그 세력이 대단했다. 이 전투에서 최인제, 정의번 등 17명이 전사하였다. 권응수는 판관 박의장과 더불어 독전하여 앞서고, 최응담, 권응평, 이방린은 그 뒤를 따랐다. 최응담(崔應淡)은 지난날의 화살 독기가 더욱 심해져 휘하 의병을 권응수의병장에게 보내고, 1593년 3월에 향년 30세로 생을 마쳤다.

  필자는 1971년에 편찬한 경산군지의 부 회당유허비(附 晦堂遺墟碑)의 기록을 근거로 그가 태어난 반계동(대구시 동구 율하동) 일대 회당유허비 현장을 찾아내기 위하여 구 안심지역 율하동, 율암동 일대 대구시연료단지 주변을 샅샅이 탐문하던 중, 연로단지 서북쪽 국도 4호선변 반야월로 97-1 지점에서 “흥해 최씨 회공공파”라는 길쭉한 현판을 걸고 새운지 60년은 넘어 보이는 허름한 목조건물에 기와형 검은 양철지붕을 덮은 주택형 사우(祠宇)를 발견하였다. 당시 필자가 발견한 회당유허비(晦堂遺墟碑)는 “崇禎紀元後 4年 丙午 元月 日立”이란 건립 연도와 “通訓大夫行 慶山縣令 眞城 李彙載 撰”이라 명기해 놓았다. 그러니 본 유허비는 이휘재 현령의 재임 말기인 1846년 병오년 정월에 이 비문을 찬하였던 것을 8세손 영(泳)이 세운 것이었다. 하지만 유허비가 서있는 현장에는 회당(晦堂)선생의 구국충정과는 달리 그를 추앙하는 사우(祠宇)와 비각이 지나치게 훼손되어 답사자로서 부끄럽고 죄송한 마음 금할 길 없었다.

  박응성(朴應成)은 경산대장 최응담 의병장과 함께 경산현 고산지역 의병장으로서, 고산면 욱수동 망월산에서 자산산성을 쌓고 왜적과 싸워 여러 번 크게 이겼다. 그의 호는 매헌(梅軒)이고,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주부 인(麟)의 2째 아들로, 무과에 올라 오위도총부도사(五衛都摠府都事)에 이르렀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는 아들과 함께 송암 김면(金沔)장군에 호응하여 의병을 일으켜 의병장이 되었다. 이때 그의 종제 박응량(朴應良)도 함께 의병을 창의하였다. 후일 박응성 의병장은 조정의 명령으로 성주 사원(士原)으로 진을 옮긴 후 왜적과 항쟁하다 불행히 전사하였다. 당시 초계 정씨의 변함(變咸), 변호(變頀), 변문(變文) 등 삼의사(三義士)와 종군하던 매헌 박응성 의병장의 세 아들 근(瑾)ㆍ장(璋)ㆍ헌(王獻)도 이때 아버지와 함께 순국(殉國)하였다. 하지만 불행 중 막내아들 무는 나이가 어려 집에 있었기에 화를 피할 수 있었다 한다.

  필자는 경산향교 정재복(84) 옹의 제보로 2016년 1월 10일 오후 현 대구광역시 수성구 고산 욱수골에 소재하였다는 박응성 의병장의 모역을 답사하였다. 욱수골 정상 8부 능선은 대부분 밀양 박씨 종친 묘역이 형성되어 있었고, 매헌(梅軒) 박응성(朴應成) 의병장의 묘역은 이 계곡 능선의 최고봉인 대구와 경산의 경계지역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 묘역의 현창은 묘비에는 檀紀 4305年 壬子 銀月上浣 傍裔墉鎭謹撰 ?書라하였고, 1972년에 밀양 박씨 문중에서 묘역 일대를 정비·현창(顯彰)하면서 예용진(裔墉鎭)이 묘갈문(墓碣文)을 적었다고 명기해 놓았다.

  임란 의사(義士) 정변함, 정병호, 정병문 또한 경산대장 최응담과 함께 임진왜란을 당하자 삼종이 함께 박응성, 최응담, 진섭, 진엽, 남종각, 전락, 승적 등과 함께 수천의 의병을 모아 현을 수호하였고, 이후 최응담, 진섭 등이 영천으로 진을 나누자 삼종은 박응성과 함께 진을 성주 사원으로 옮겼다. 성주전투에서 박응성 의병장 부자가 전사하자 연이어 경남 창녕 곽재우 의병장의 진영으로 나아가 화왕산성(火旺山城)을 지켰다. 삼의사는 난이 평정된 이 후 아우들과 함께 동산아래 은퇴하여 학행을 닦았다 한다.

  또한 원경산의 전통문화(1994, 경산시)에 의하면, 경산현역에 임란과 관련하여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 그는 비록 당시 경산향교의 노복이었다지만 임란 당시 모두가 도망가고 피난하였을 때 왜적으로부터 향교를 지켜내기 위하여 경산향교의 5성 위패를 성암산 범굴 속으로 옮기고, 제향을 모시던 제기는 바위굴 아래에 파묻어 난리의 화를 면하게 하였다. 이로서 병화가 끝난 뒤 여러 고을에서 향교의 위판과 제기 혹은 제를 올릴 때 입는 옷가지 등의 법식을 경산향교의 것을 본으로 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경산현 구역에는 앞에서 거명된 의병대장, 의병창의 의사 이외에도 진섬, 진엽 형제, 정응지, 정응례, 응삼 삼형제, 장여란, 장이원 형제, 박용득, 승적, 어운한, 최덕기 전락, 장몽기, 김달선 등, 여러 의병들의 명단이 문천회맹록, 화왕상성 동고록, 공산회명 등에 등재되어 있으나, 문헌자료가 부족하여 이를 구체화 하지 못함이 부끄럽고 안타깝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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