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성산 선광사 마애약사여래좌상 조성

  • 기사입력 2016.08.03 21:43
  • 최종수정 2016.08.03 21:46
  • 기자명 김종국 객원기자


▲ 현성산 선광사에 봉안한 마애약사여래좌상
  경산시 점촌리에 소재한 현성산 선광사(주지 선웅스님)는 지난 7월 29일 경산시 소재한 사찰 중 최초로 마애약사여래좌상(磨崖藥師如來坐像)을 조성하여 이운(移運)하였다.

  본 마애석불은 지난 해 3월, 경주에서 생산된 화강암(황토색 계열)을 이용하여, 높이 2.70m, 폭 2.00m에 불상을 새기고, 그 아래 0.90m의 기단석을 조성한 마애약사여래좌상으로, 사진에서와 같이 불상의 후광(後光)은 앙련(仰蓮) 형식에 연꽃잎 모양에 평균 50cm 가량의 감실(龕室)을 파고, 연꽃잎 속에 활활 타오르는 염화문양(炎火紋樣)을 새겨 넣었다. 이는 곧 약사여래불의 권능과 역할이 그렇듯, 질병에 고통 받는 자에게는 병을 낫게 하고, 병마(病魔)는 염화문양의 형상에서와 같이 모두 활활 태워버리겠다는 강한 불교적 스토리텔링의 응용 기법이 설화적 바탕위에 표현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이 불상은 지난 50여 년간 이 분야에 종사한 향토작가(와촌면 소재) 만해석조원 이태만(대표, 62세) 석공장(石工匠)이 1년여 동안 혼을 담아 이루어 낸 석공예작품으로, 묘사기법이 뛰어난 대작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한 본 마애약사여래좌상은 ≪약사여래본원공덕경≫에 근거하여 여러 권능을 설화적 모티프를 통하여 한 잎의 연꽃에 고스란히 표현하고 묘사하였다는 점에서 본이 되고 있다. 이는 결가부좌한 자세위에 두 손을 가지런히 모운 선정인(禪定印) 속에 꼭 잡아 끌어안은 듯한 약합(藥盒)은 금시라도 뚜껑을 열어 병든 자를 구할 요량이고, 그 뒤에 이글이글 타오르는 염화문양은 병마를 모두 태워 없애려는 모양새다.

  석공장 만해(萬惠) 이태만 작가는 자신이 60평생 동안 이루고 싶었던 작품을 이제 이루게 되었다하며, 이로서 모든 이들이 건강하기를 서원하였고, 한편 선광사(주지 선웅스님)는 오는 8월 10일 오후, 불상 봉안(奉安)을 위한 점안식(點眼式)을 갖기로 하여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 약사여래의 권능과 상징적 의미

  약사불(藥師佛)은 불가(佛家)에서 중생에게 질병의 고통을 없애주는 부처로‘약사유리광여래(藥師琉璃光如來)’‘대의왕불(大醫王佛)’이라고도 한다.

  또한 약사여래는 동방정유리세계에 살면서 12대원을 발하여 모든 중생의 병을 치료하는 한편, 수명을 연장해주는 의왕으로서 신앙되어 온 부처로서,《약사여래본원경》에 따르면, 약사불이 머무는 동방정유리세계는 아미타정토와 같고, 약사의 좌우에는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이 있고 12신장을 권속으로 거느린다고 하였다. 또한 손에는 약합(藥盒)을 들고 있는 것이 특징이나 원래는 보주(寶珠)를 쥐고 있었다고도 한다. 중국에서는 당나라 때부터 약사경변상도가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약사의 도상은 8세기경에 정형화되었다.

  우리나라에는 신라 선덕여왕 때 밀본법사(密本法師)가 《약사경》을 읽어 왕의 병을 고쳤고, 경덕왕대에는 경주 분황사에 거대한 약사불을 봉안하였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라 7세기 중엽부터 8세기 중엽까지 약사신앙이 널리 보급되어 왔던 것으로 추정할 수잇다.

  고려시대에는 국가적인 위기에 대처하기 위하여 약사여래를 본존으로 한 약사도량이 자주 열리기도 하였으며, 그 대표적인 작품이 통일신라대의 경주 백율사(栢栗寺) 금동약사불입상과 굴불사지(掘佛寺址) 동면 약사불좌상을 들 수 있다. 여기에 12신장을 권속으로 거느린 약사신중도(藥師神衆圖), 동방정유리세계를 그린 약사정토변상도(藥師淨土變相圖)에서 나타나는 12가지 대원(大願)에는 첫째 내 몸과 남의 몸에 광명이 가득하게 하려는 원, 둘째, 위덕이 높아서 중생을 모두 깨우치려는 원, 셋째, 중생으로 하여금 욕망에 만족하여 결핍하지 않게 하려는 원, 네째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대승교에 들어오게 하려는 원, 다섯째,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깨끗한 업을 지어 삼취정계(三聚淨戒)를 갖추게 하려는 원, 여섯째, 일체의 불구자로 하여금 모든 기관을 완전하게 하려는 원이 있다. 또 일곱째, 몸과 마음이 안락하여 무상보리를 증득하게 하려는 원, 여덟째, 일체 중생이 모두 원하는 성별로 태어나게 바라는 원, 아홉째, 천마(天魔)·외도(外道)의 나쁜 소견을 없애고 부처님의 바른 지견(知見)으로 포섭하려는 원, 열 번째, 나쁜 왕이나 강도 등의 고난으로부터 일체중생을 구제하려는 원, 열한 번째, 일체중생의 기갈을 면하게 하고 배부르게 하려는 원, 마지막으로 가난하여 의복이 없는 이에게 훌륭한 옷을 갖게 하려는 원 등이다.

  이것이 약사십이대원이며, 그 공덕으로 부처가 되었고, 또 한량없는 중생의 고통을 없애 준다는 것이다. 이 십이대원 속에는 약사여래가 단순히 중생의 병고를 구제하는 일에 그치지 않고 의복이나 음식 등의 의식주문제는 물론 사도나 외도에 빠진 자, 파계자, 범법자 등의 구제에까지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십이대원은 이외에도 극락왕생을 원하는 자, 악귀를 물리쳐서 횡사를 면하고 싶은 자, 온갖 재앙으로부터 보호받고 싶은 자들이 약사여래의 명호를 부르면서 발원하면 구제를 받을 수 있다 하였다.

  또, 외적의 침입과 내란, 성수(星宿)의 괴변, 일월의 괴변, 때 아닌 비바람, 가뭄, 질병의 유행 등 국가가 큰 재난에 처했을 때도 약사여래의 본원력을 통하여 구제받을 수 있다고 한다. ≪약사여래본원공덕경≫에 근거하여 약사여래를 신봉하는 약사신앙은 우리 나라의 고대에서 뺄 수 없는 중요한 신앙형태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불가에서는 그의 명호만 외우고 그에게 지극한 마음으로 가호를 빌면 모든 재액이 없어지고 질병이 낫게 된다는 실리적인 신앙 형태를 부가하고 있어 일반 민중들 사이에 강한 메시지와 설득력을 가져왔다. 그 예로, 삼국의 전쟁 중 수많은 희생자와 병자를 냈던 상황 속에서 약사여래는 새로운 구원자로 등장하였다는 것과, 선덕여왕이 병에 걸려 의약의 효험이 없었을 때 밀본법사(密本法師)가 여왕의 침전 밖에서 ≪약사경≫을 염송하여 병을 낫게 했다는 설화 등은 약사신앙 유포의 중요한 일면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으며, 통일 후의 신라 조정에서 ≪약사경≫에 대한 연구가 경흥(憬興)과 태현(太賢) 등의 고승들을 중심으로 활발히 이루어졌다는 점과 신라 사방불 조성에서 동방에는 항상 약사여래를 봉안하였다는 점은 곧 당시까지 약사신앙이 널리 대중화되었음을 밝혀 주는 사례이다.

  고려시대에도 국가적 위기가 닥칠 때마다 약사도량이 자주 개설되었다는 기록과 약사의 명호를 외우면 국가의 재난이 소멸된다는 약사여래의 본원에 근거를 두었다는 점 등은 조선시대 이전의 약사신앙이 민중신앙 속에 깊이 자리하고 있음을 대변하는 자료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약사여래의 권능과 역할은 예부터 우리들의 민중 속에 다양한 양상으로 전승되어 오고 있다(본 기사는 ≪약사여래본원공덕경≫을 인용하여 풀이한 것임을 밝혀 둔다).

 ※ 본고는《약사여래본원경》을 근거로 발췌 한 것임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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