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천면 송백리의 발해태씨 춘분대제 향사

  • 기사입력 2015.03.24 11:52
  • 최종수정 2015.03.24 11:54
  • 기자명 김도경 기자

 

  발해마을 고황전 발해 황제 춘분 대제남천면 송백리(발해마을)에서 3월21일 춘분일에 전국에서모인 300여명의 태씨 후손들과 내빈들이 모여 춘분대제 향사를 성대히 올렸다.

  발해 (해동성국) 700년 사직이 나 당 연합군에 의해 서기668년 무너졌다. 그때 고구려 대중상 대장군은 아들 대조영장군과 고구려재건의 웅지를 품고 고구려유민과 말갈유민들을 합세하여, 696년 거란의 반란을 계기로 28년간의 각고 끝에 현재의 중국 지린성 둔화현 동모산을 중심으로 진국이라는 나라를 세웠다.

  698년 대조영고황제가 국호를 발해라고 고쳤다. 발해는 주변부족들을 차례로 복속시키고 5경15부62주의 행정조직을 세우고 사방5천리에 달하는 세력을 확장해 옛 고구려 영토를 모두 되찾았다. 그 후 남으로 신라, 서로 당나라, 동으로 일본 등과 수교를 맺어 국교를 넓혀 나갔다.

  당나라에서 해동성국이라 불리며 국운이 융성했으나 926년 애왕 때 내란과 거란의 침공, 2차 백두산 화산폭발 등으로 인해 15대에 걸쳐 면면히 내려오던 발해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백두산의 2차폭발의 힘이 얼마나 컸던지 일본에 쌓인 분진이 5mm 였다고 한다.
  내분과 외침, 화산폭발 등 복합적인 환란으로 발해는 역사는 땅속으로 묻혔다.발해의 역사가 묻혀진 이유 중 하나는 신라의 무관심이 컸다고 하겠다. 그때 발해와 신라는 남북국시대를 형성하고 있었음에도 역사기록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발해역사는 그야말로 땅속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근래 중국에서는 동북공정을 앞세워 발해역사를 발굴해서 땅에 묻힌 발해 유물을 발굴해 중국의 역사로 귀속시켰으니 통탄할 일이다. 발해 땅과 대한민국은 한겨레라고 할 수 있다.

  발해는 고구려유민, 말갈족, 일부거란족과 많은 소수민족의 집합체로 구성된 국가였지만 지배계층이 고구려 유민이었기 때문에 우리나라역사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현재 중국에서는 고구려와 발해, 우리나라까지도 중국역사의 일부로 만들어 버렸다. 우리나라 역사학자들도 분발하여 우리역사를 바로 세워 발해와 대한민국은 한뿌리며 단군의 후손임을 알려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바로 세워주기를 바란다. 

  남천면 송백리의 발해태씨는 발해국 마지막 세자 대광현이 수 만의 발해유민을 이끌고 고려로 귀화한 후손이다. 고려태조 왕건이 발해국 세자 대광현에게 정통성을 이어가도록 배려해 주었다. 발해 대씨가 태씨로 바뀐 까닭은 큰대자보다 클태자를 더 큰 뜻으로 쓰였기 때문이다. 동사통감고왕에 관한 기록에 대조영을 태조영으로 기록했다.

  이것은 태자를 대자보다 큰 의미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중국에서는 대왕을 태왕이라 불렀던 것으로 볼 때 걸걸 중상을 태중상으로 표기한 것을 봐서도 알 수있다. 태씨의 본관은 협계와 영순, 두본이 있다. 발해태씨는 협계와 영순을 통합해 대광현 세자에게 봉해진백주(배주)를 본관으로 하고 협계공파와 영순공파로 정했다.

  경산태씨는 서기 1592년 태금순선조가 상방동에 자리를 잡았다가 지금의 송백으로 이거해서 현재에 이르고있다. 서기 1920년 송백에 추모제와 상현사를 중건하여 매년 춘분날을 기해 전국의 후손들이 모여춘분향사를 봉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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