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곡할 권리를 허락하라!" (축제는 청년의 권리이다)

  • 기사입력 2022.12.11 17:53
  • 기자명 자유기고가_이진구
이진구(자유기고가)
자유기고가
이 진 구

    진나라 환온이 촉으로 가다가 장강 중류의 삼협을 지나게 되었는데, 한 병사가 새끼 원숭이 한 마리를 잡아 왔다. 새끼를 빼앗긴 어미 원숭이는 강안부터 애절하게 울며 백여 리를 뒤따라와 마침내 배 위에 뛰어올라 배를 부여잡고 죽고 말았다. 원숭이의 배를 가르고 보니, 창자가 모두 토막토막 끊어져 있었다. 눈앞에서 자식이 잡혀가는 것을 보는 어미의 미어지는 애절함에 창자까지 끊어진 것이다. 
  짐승의 새끼 잃은 슬픔이 이러한대, 품고, 토닥이며 금이야 옥이야 키워온 사람의 자식이야 비할바가 있겠는가!
 “아이 생각이 나서 아침에 눈 뜨는 것이 너무 고통스럽고 해뜨는 것이 두렵습니다.”
 “발자국 소리나 문여는 소리가 들리면 아이가 오는 것 같아 소름 돋고 깜짝깜짝 놀랍니다.”
 “배상 필요없습니다. 국가로부터 돈은 필요 없고, 사고 책임을 가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10.29 이태원참사로 아이를 잃은 유기족들의 삶은 무너지고, 창자가 끊어질듯한 슬픔은 멍어리로 굳어져 가슴 한가운데 남아있다.
  하물며 참사 현장에 있었던 119 소방대원, 간호사, 기자들도 눈앞에서 죽어가는 청춘들을 구하지 못한 심각한 트라우마 때문에 낮에도 힘들어 일하기 어렵다고 호소하는데 유족들이야 오죽하랴. 
 “아이는 숨 못 쉬고 떠났는데,‘배가 너무 고파 내 입으로 혹시 밥이라도 들어가면 어쩌지’라는 생각에 내 입을 꿰매 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이 아픔들을 어떻게 보듬어야 하는가!

  정여울 작가는 중앙일보에 슬픔의 치유와 목놓아 울 권리를 단속하는 정부 대해 이렇게 쓴다.
  [모든 슬픔은 타인의 슬픔과 끝내 연결되기를 꿈꿉니다. 슬픔의 본성입니다. 나뿐만 아니라 당신도, 그들도, 온 세상이 똑같은 슬픔을 앓고 있음을 알면, 슬픔은 비로소 마음껏 소리 내어 울 수 있는 안식처를 찾게 됩니다. 내 심장에만 갇혀 있던 슬픔이 당신과 나의 맞잡은 손, 내 흐느끼는 어깨를 감싸는 당신의 손길 위에 머물기 시작하면, 바위처럼 단단하게 굳어 있던 슬픔은 비로소 노래처럼 연기처럼 풀어헤쳐져 당신과 나, 우리들의 ‘사이’에 존재하게 됩니다. 그것이 치유의 첫걸음입니다.]

  참 이상하게도 10.29 이태원참사에 대해 정부는 슬픔을 강압적으로 통제해 유가족과 국민이 속으로 울고 있다. 심하게는 슬퍼해도 되는지 자기검열까지 하게 될 정도로 통제하고 겁박한다.
  위패도 영정도 없는 분향소에서 정해진 시간에만 울도록 하며 슬퍼하는 방식도, 장소도, 기한과 용어까지도 정부가 통제함으로써, 유족들은 물론 진정으로 함께 슬퍼하는 우리 평범한 사람들의 공감조차 차단되고 있다. 
  근조 리본은 거꾸로 달아야 하며, 분향소는 지자체에 1개 이상 설치하지 못하며, 유족들은 서로 연락하지 못하게 하라고 공문까지 내렸다고 하니, 꽃다운 청춘의 참사를 대하는 정부가 희생자와 부상자와 유가족과 국민을 위해서 일하는지, 오로지 슬픔을 차단하여 혹시나 생길지 모르는 정치적‘원망’을 막기 위함인지 판단이 쉽지않다.
  이에 더하여 정부ㆍ여당 관련자들은 희생자 공개와 애도를‘2차가해’‘폐륜’이라는 단어로 의미를 비틀어 사용하며, 희생자들은 [놀러갔다 사고 당한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사람]들로 규정해버린다. 
  그래서 유가족들이 공개로 슬퍼하면 안 된다는 듯 몰아가는 진짜 폐륜행위까지 서슴지 않는다.

  통곡할 권리를 허락하라!
  축제와 여행은 우리 삶이다. 특히 청년의 삶에서 놀이는 권리다. 
  1989년 힐스버러 스타디움 붕괴로 96명의 희생자와 200명이 넘는 부상자가 생긴 참사도 리버풀과 노팅엄 포레스트의 축구경기를 보기 위해 놀러간 국민이 당한 참사다. 
  1997년 대한항공 801기가 괌 국제공항 접근 중 추락해 승객 254명 중 228명이 사망한 사고도 승객 대부분은 관광목적 여행이었다.
  그 외에도 많은 참사가 축제와 여행, 공연과 관계있다. 놀이가 우리 삶 일부이기 때문이다. 놀이 과정 중에 생긴 참사를 전 국민이 애도했고, 축구 경기장, 괌 국제공항 사고현장 등 대부분 참사 현장에 추모비를 세워 세계가 애도하고 있다. 축제를 즐기다 당한 참사에 희생자와 부상자의 책임은 전혀 없다.
  내 아이 초등학교 6학년 때 대구 월드컵 공원에서 열린 '할로윈 축제'에 따라간 적이 있다. 할로윈 행사는 낯설지만 축제였고, 이해하는데 시간이 걸렸지만 그들의 문화였다. 아무런 문제 없는 그들 삶의 일부였다. 중장년층이 이해하지 못하는 축제에 참석했다고 청년의 삶을 일탈로 몰아 마치 참사의 책임을 희생자에게 돌리듯 하는 책임전가는 절대 안 된다. 
  통곡할 권리를 허락해야 한다. 
  엄청난 참사를 맞이한 국민도 아무 일 없듯 애써 외면하며 일상에 임하지만, 내 가족, 내 친구, 내 이웃을 잃은 슬픔은 틀어 막은 손가락 사이에서 더 큰 압력으로 터져 나올 수 밖에 없다.

  원숭이 어미의 단장 이야기를 전해 들은 환온은 크게 노하여 그 병사를 내쫓아 버렸다.
한마리 동물을 죽음에 이르게 한 병사에게도 출병사의 벌을 내렸는데, 꽃다운 청춘 158명의 목숨을 지키지 못한 국가의 책임이야 태산 같다. 
  최소한 법을 떠나 도의적 책임으로라도 물러나게 할사람 물러나게 하고 유가족의 슬픔을 통제하려는 시도를 멈추어야 한다.
  오히려 그것이 정부 지지를 회복하는 사회 통합의 길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통곡할 권리를 허락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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