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고향_경산시 와촌면편(1)] 와촌면 계전1리 은진송씨 집성촌

  • 기사입력 2023.01.14 19:10
  • 기자명 김종국 기자
▲ 와촌면 계전리 은진송씨 집성촌
▲ 와촌면 계전리 은진송씨 집성촌

  와촌면 계전1리는, 경상북도 경산시 하양읍 소재지에서 동북쪽으로 4km, 와촌면 소재지에서 같은 방향으로 약 1.5km 떨어진 곳에 있다.
  마을의 입지 조건은 서쪽에 청통천(淸通川)이 흐르고, 북쪽은 해발 235m인 환지봉(還芝峯)을 중심으로 산들이 배치되어 있으며, 서남쪽만 트여서 논밭을 펼치고 있다. 이 마을은 언제부터인가 5개의 자연부락이 형성되면서 행정구역상 계전1, 계전2리로 나누어져 있다.
  이 마을의 유래와 입향조, 개척 시기는 다음과 같이 전승되고 있다. 즉, 동편에 용전(龍田) 마을은 1540년경 경주(慶州) 최씨(崔氏)가 개척하였고, 현재는 하양 허씨(許氏)가 주를 이루고 있다. 
구전에 의하면, 용전(龍田)이란 지명은 신라시대에 용전사(龍田寺)가 있어 유래하였다 하나, 현재는 흔적조차 찾을 길 없다. 
  용전의 앞쪽에 본래 말리란 마을이 있었는데, 현재 90여 호 중, 은진송씨가 40여 호, 경주 최씨 10여 호, 하양 허씨 10여 호, 여타 각성바지가 30여 호 거주하고 있다.
  또한, 이 마을의 북편에는 “골새”라 하여 1791년에 은진송씨를 중심으로 개척하였는데, 입향조는 양오당(養吾堂) 송응현 선생의 8대손 남계(南溪) 공 경윤(景潤) 선생이다.
  현재까지 계전1리에는 은진송씨가 전거(奠居)하면서 2건의 고건축물이 남아있는데, 이 중 하나는 원계서원(遠溪書院)이요, 다른 하나는 은진송씨 송재수의 김씨 부인의 효열각(孝烈閣)이다.
  이 마을은 은진송씨와 하양 허씨, 경주 최씨, 평산신씨 등 타성바지가 집단 거주하면서 언제부터인가 마을 동구에 당산목을 심고, 매년 정월 대보름날 마을의 풍요와 안녕을 기리는 당산제(堂山祭)를 올리고 있다.
  은진송씨의 본관(本貫)인 은진(恩津)은 충청남도 논산시 은진면 일대 지명으로, 은진송씨(恩津宋氏) 시조(始祖)는, 당나라에서 호부상서(戶部尙書)를 지낸 송주은(宋柱殷) 공 7세손인 송순공(宋舜恭)의 후손 자영(自英)의 세 아들 중, 맏아들 유익(惟翊)은 여산 송씨(礪山宋氏) 시조, 둘째 아들 천익(天翊)은 은진송씨(恩津宋氏) 시조, 셋째 아들 문익(文翊)은 서산 송씨(瑞山宋氏)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그 외 진천(鎭川), 신평(新平), 야성(冶城) 등 10여 본이 있는 것으로 전해지나, 이후 여러 차례 분파(分派)로 고려국에 판원사(判院事)를 지낸 은진군(恩津君) 송대원(宋大原) 공이 세계(世系)를 잇게 되었다고 한다.
  이어 송대원의 증손자인 송명의(宋明誼)가 1362년(고려 공민왕 11) 문과에 급제하고, 사헌부 집단(司憲府 執端)에 이르렀으나, 고려가 망하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로 낙향하여 처가인 회덕(현 대전시) 황씨촌에 자리 잡았다 하였다.
  또한, 은진송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79명, 정승 2명, 대제학 1명, 경영관 12명을 배출하였는데, 특히 목사공파(牧使公派)와 정랑공파(正郞公派)에서 많은 인물이 나왔다 한다. 
  현 와촌면 계전1리 원계서원(遠溪書院)은 송대원 공의 12세손인 송응현(宋應賢) 선생과 아들 송걸(宋傑) 선생 부자를 제향하는 제당(祭堂)으로, 송응현의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사희(士希), 호는 양오당(養吾堂)이고, 아들 송걸의 자는 관옥(冠玉), 호는 양곡(陽谷)이다. 
  송응현 선생은 일찍이 조정에서 관직에 봉직하다 만년에는 지금의 경상북도 청도군 화악산(華岳山, 일명 화산)에 전거(轉居)하였다. 선생은 이곳에 양오당(養吾堂)을 짓고,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힘썼다.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선생은 아들 송걸과 함께 화악산에서 의병을 창의하여 왜적과 맞섰으나, 결국 부자가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함께 의사(義死)하였다. 이로써 1605년에 부자가 나란히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2등에 녹훈되었다. 
  이에 대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 비서원승규장직각(秘書院丞奎章直閣)을 지낸 송규헌(宋奎憲) 공이 선생의 묘갈명에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선생은 대대로 무관(武官)의 집안에서 태어나 성품이 대범하였으며, 또한 큰 뜻을 품고 있었다. 더욱이 독서를 좋아하여 일찍이 어질고 뛰어나다는 평을 들었으며, 문무를 겸비하기 위하여 무도(武道)를 익혔다. 또한 선생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내(道內)의 열읍(列邑)이 와해(瓦解)되고, 사람들이 적에게 죽임을 당하니, 이는 진실로 위급한 때로다 하며, 평생토록 충(忠)과 의(義)로써 이야기하고, 마음으로 되새겼거늘 어찌 이를 가만히 앉아서 보고만 있겠는가.” 하며, 아들인 양곡(陽谷) 선생과 함께 청도에서 의병을 모집, 망우당 곽재우(郭再祐) 선생과 협력하여 적을 토벌하기로 약속하였다. 
  하지만, 의병을 이끌고 망우당 선생에게로 가는 도중 적의 대군을 만나 힘을 다해 싸우다가 양오당 선생과 양곡 선생 모두 적에게 죽임을 당하게 되었으니, 이 어찌 하늘의 뜻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에 두 부자의 죽음을 들은 양오당 선생의 부인 광주(廣州) 김씨(金氏)는 통곡하면서, “내 어찌 구차하게 홀로 살아남으리오”하며 선생을 따라 목숨을 끊었고, 양곡 선생의 부인 김씨는 세 살배기 아들을 업고 시신을 수습하여 당시 청도군 각남면 내사리(현 사리)에 안장하였다고 하나, 전란(戰亂) 후 수년 뒤 묘소를 찾지 못하여 서남정(棲南亭) 등(嶝) 상단에 단소(壇所)를 마련하여 시제를 배향하여오던 중, 1998년에 후손들의 뜻을 모아 단비(壇碑)를 세우고 묘역을 정비하였다. 
  1605년(선조 38), 도승지 상촌(象村) 신흠(申欽)은, 전지(傳旨)를 받들어 선생 부자를 선무원종공신이등(宣武原從功臣二等)에 병록(幷綠)하였으며, 나라에서는 양오당 선생에게는 첨정(僉正)을, 양곡 선생에게는 주부(主簿)로 각각 제수하였다. 
  이에 덧붙여 송규헌 선생은 묘갈문 뒤에 다음과 같은 시문을 남겼다.
 “빛나는 절개는 일월보다 빛나도다. 아내와 자식은 열부(烈婦)요 충자(忠子)였으니, 선생의 화감(化感)에 누가 이르리오. 내 글이 비록 질박하나 영세토록 전하리라”하였다.
  원계서원(遠溪書院)은 선생이 돌아가신 후, 3백여 년이 지난 1927년에 지방 사림(士林)의 공의에 의하여 지어졌다. 

▲ 원계서원 전경(경산시 와촌면 계전리 489번지) 
▲ 원계서원 전경(경산시 와촌면 계전리 489번지) 

  서원의 입구에 서면(西面) 우측으로, 입향조인 남계 공 추모비가 있고, 정문은 내삼문으로 선생의 업적을 기려 충의문(忠義門)이라 편액하였다. 
  충의문(忠義門)이란 편액이 걸린 산형대문(山形大門)을 들어서면 좁은 마당 사이에 강당(講堂)이 자리 잡고 있다. 이 강당은 정면 4칸, 측면 1칸 규모의 맞배기와집이며, 평면은 가운데의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둔 중당협실형(中堂挾室形)이다. 대청에는 우물마루를 깔고, 전면에는 툇마루를 설치하였다. 좌측방은 집의당(集義堂), 우측방은 경의재(敬儀齋)라 하였다.
  가구(架構)는 3량가(三樑架)의 간결한 구조이며, 처마는 홑처마이다. 사당(祠堂)은 강당 뒤의 경사진 대지 위에 자리 잡고 있는데, 주위에는 담장을 둘러 별도의 공간을 두고 있다. 평대문(平大門)으로 이루어진 내삼문(內三門)에 들어서면, 서원의 우측은 봉성실(奉誠室)로 편액(扁額)한 협실(夾室)이 있으며, 정당(正堂)과 협실(夾室) 사이의 길을 따라 뒤로 돌아 계단을 오르면 양오당(陽吾堂) 송응현(宋應賢) 선생과 양곡(陽谷) 송걸(宋傑) 선생을 배향하고 있는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충덕사(忠德祠)가 있다. 
  충덕사(忠德祠) 평면은, 전면에 퇴칸(退間)을 두지 않고, 내부를 모두 통칸(通間)으로 구성하고, 기둥은 정면과 측면에만 원주(圓柱)를, 기둥 위에는 이익공(二翼工)으로 장식하였으며, 가구(架構)는 대량(大樑) 위에 동자주 대공(童子柱 臺工)을 세워 마룻대와 장혀[長舌]를 받게 한 3량가(三樑架)의 간결한 구조이다. 처마는 겹처마이고, 지붕은 맞배기와집인데, 양측 박공면(朴工面)에는 풍판(風板)을 설치하였다. 향사는 매년 2월 하정(下丁)일이다.

 

▲ 원계서원 좌측 은진송씨 입향조 남계 선생 추모비
▲ 원계서원 좌측 은진송씨 입향조 남계 선생 추모비

  또한 이 마을에는 효열부(孝烈婦) 김씨(金氏) 효열각(孝烈閣)이 있다. 
  열부(烈婦) 김씨 부인 효열각은 경산시 와촌면 계전리 492번지에 소재하고, 그 축조 시기는 대략 1900년대로 추정되고 있다.

▲ 김씨 부인 효열각(계전리 492번지)
▲ 김씨 부인 효열각(계전리 492번지)

  이 효열각은 와촌면 소재지에서 1.5km 떨어진 계전리 마을 입구 산기슭에 자리하고 있으며, 규모는 사방 1.8m로 이 마을 은진송씨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이 건물은 이 마을 은진송씨의 송재수 부인 김씨 부인의 열행(烈行)을 기리기 위하여 1959년 2월 22일 송씨 문중에서 건립한 효열각으로, 부인은 19세에 양오당 송응현의 13세 후손인 송재수에게 시집와 24세에 남편을 잃고, 남편의 상례를 마치고 자신도 남편 뒤를 따라 죽고자 하였으나, 시어머니 봉양을 위해 그러지도 못하고. 79세에 시모가 별세하시기까지 극진히 봉양하였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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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공산이 아스라이 다가오는 와촌면 계전1리는, 예부터 우국충정(憂國衷情)의 고장이요, 효열(孝烈)·충절(忠節)의 고향이라, 청통(淸通)에서 금호(琴湖)로 흘러내리는 청통천(淸通川)이 계전(溪田)에 넓은 들을 적시니, 여기가 곧 기름진 땅에 풍요로움이요, 천만년의 꿈이로니, 뒤돌아보고, 또 바라보아도 어느 것 하나 넉넉하지 않음이 없고, 걸림이 없다.
  ※본 원고는, 은진송씨 계전1리 문중의 증언과 경상북도 지명유래총람(1984, 경상북도교육위원회), 경북마을지(1990, 경상북도), 경산시지(1997, 경산시), 경산군지(1971, 경산군), 경산문화총람(1997, 경산대학교), 경산의 임란항쟁(1999, 경산문화원), 경산의 전통건축물(2002, 경산문화원), 경산임란창의(2016, 대구대학교 삼성현연구소), 경산의문화유적기문, 2002, 대구대학교) 등을 참고문헌으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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