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고향 경산시 용성면편(3)_용성면 곡신리 흥해 최씨 집성촌

  • 기사입력 2023.02.14 00:51
  • 기자명 김종국 기자
▲ 용성면 주산인 용산 아래 첫 마을 곡신리
▲ 용성면 주산인 용산 아래 첫 마을 곡신리

  경산시 용성면 곡신리는 용성면 소재지에서 남쪽으로 1.8km 떨어진 용산(龍山)의 동북쪽 기슭에 자리 잡은 마을이다. 

이 마을은 처음 인동(仁同) 장씨(張氏)가 개척한 후 흥해(興海) 최씨(崔氏)와 순천(順天) 박씨(朴氏)가 이주하여 살게 된 마을이다. 

  이 마을의 역사적 인물은 임란 의병장(義兵將)이었던 죽은(최팔개), 죽포(최팔원)의 고향이기도 하다. 또한 이 마을은 열녀 남원(南原) 양씨(梁氏) 마을로, 조선 헌종이 1846년 사액(賜額) 정여각(旌閭閣)을 내린 곳이기도 하며, 마을 지명유래가 그렇듯 곡신(谷新)이란 용산(龍山)의 수계(水系)에 새롭게 형성된 마을이란 의미를 갖기도 한다.

  이 마을은 흥해 최씨의 집성촌으로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또한 이 마을의 입지 조건은 서쪽에 해발 435m인 용산이 솟아있으며, 마을 앞에 흐르는 내가 있어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형이다. 

  곡신리는 처음 인동 장씨가 마을을 개척하였다 하나, 이후 흥해 최씨가 대거 전거(奠居)함으로 그 개척 시기는 분명하지 않으나, 이 마을 출신이었던 죽은, 죽포 선생이 임란 발발과 때를 같이하여 마을에 청장년(靑壯年)들과 규합(糾合)하여 창의(倡義)하였던 점 등을 미루어 곡신리에 전거한 흥해 최씨의 입향조는 사실상 죽은 죽포 형제의 1~2세로 짐작할 수 있다.

  죽은(竹隱) 죽포(竹圃) 선생의 실기에 의하면, 임란 당시 두 형제의 우국충정을 다음과 같이 수록하였다.

  형인 죽은(竹隱) 최팔개(崔八凱) 선생은 1560(명종 15)년, 아우인 죽포(竹圃) 최팔원(崔八元) 선생은 1562년(명종17)에 자인현 상동면(용성면) 곡신리에서 형제로 태어났다. 

  죽은 선생은 눈동자가 환하고 귀와 코가 커서 크게 쓰일 것이라고 하였으며, 죽포(竹圃) 선생은 뜻이 매우 크고 기개가 있었으며, 생각하는 바가 매우 넓었다고 전한다. 또한, 죽포(竹圃) 선생은 백부에게 아들이 없자 백부의 후사를 잇게 하였다.

  1585년(선조 18), 죽은(竹隱), 죽포(竹圃) 선생은 항상 강개한 생각을 가지고 세상의 돌아가는 모습에 탄식하곤 하였는데, 이에 두 선생은 병서(兵書)와 아울러 무예(武藝)와, 활쏘기, 말타기, 검술 등을 두루 섭렵하기 시작하였으며, 죽포 선생은 이후 을과(乙科)에 발탁되어 권지부정사(權知副正字), 무공랑박사(武功郞博士), 전생서봉사(典牲署奉事)등의 관직생활을 하다가 1592년 임진왜란을 만났다.

  죽은(竹隱), 죽포(竹圃) 선생은 임란발발과 동시,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의 격문을 받고 일족 다수와 마을 장정을 모아 동래(東來)로 향하였다. 

  경남 언양(彦陽)지역에서 적을 만나 30여 명을 베고 그들의 말을 탈취했으며, 양산에서도 적을 무수히 베었다. 

  뒤에 동래성의 적과 싸워 적장 조박붕(鳥博鵬)을 베는 전과를 올리자, 왜병들이 모두 놀라 물러나며 싸우려 하지 못하였다. 

  훗날 이러한 죽포 선생의 모습을 통훈대부행경산현령(通訓大夫行慶山縣令) 이휘재(李彙載)가 죽포 선생의 묘갈명(墓碣銘)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재도부산 겨우 부산에 이르렀는데,
기무사색(氣霧四塞) 기운은 안개처럼 사방이 막혔네.
분인일호(奮인一呼) 칼을 떨쳐 한 번 소리침에,
두 적장의 머리 떨어지고.
성문대조(城門大조) 성문이 크게 떠들썩하니,
견폐호효(犬吠虎哮) 개가 짓음에 호랑이가 소리치는 듯하다.

  조박붕이 죽고 날이 저물자, 왜군이 새까맣게 모이니 먼지가 하늘을 덮어 동서를 구분할 수가 없었다. 

  이에 죽포(竹圃) 선생은 단신으로 적을 맞아 적진으로 들어가 싸우니, 이후 선생을 다시 볼 수 없었다. 

  함께 갔던 가동들도 죽포(竹圃) 선생이 간 곳을 알지 못하였으니, 죽은(竹隱) 선생은 이 사실을 듣고 분함을 이기지 못해 죽고자 하였으나, 종사(宗社)를 의탁한 바가 없음을 생각하고는 가슴을 치며 통곡하였다. 

  그리고는 죽포(竹圃) 선생의 시신을 찾았으나 찾을 수 없어서 다만 초혼제를 지내고는 고향에 돌아와 죽포(竹圃) 선생의 유품으로 장사를 지내었다고 한다. 

  이후 죽은(竹隱) 선생 또한 죽음을 맞이하는데, 선생이 돌아가신 연도는 알 수 없고, 다만 돌아가신 날만 정월(正月) 19일이라는 것이 선생의 묘갈명에 기록되어 있다.

  두 선생의 죽음에 대하여, 오천(烏川) 정화식(鄭華植) 선생은 죽은(竹隱) 선생의 묘갈명에 다음과 같이 적어 탄식하였다는 기록을 남겨 놓았다.

위국서사(爲國誓死) 나라를 위해 죽기를 맹세했건만,
형생제사(兄生弟死) 형은 살고 아우는 죽었도다.
적수의동(跡殊義同) 행적은 다르나 의(義)는 같으며,
사향역동(祠享亦同) 사향도 또한 같도다.

기심간혜(其心艱兮) 그 마음 알기 어렵고,
기행익간(其行益艱) 그 행적 알기 더욱 어렵네.
현회시야(顯晦時耶) 어둠이 밝게 드러남에,
불사절야(不死절야) 절개는 죽지 않으리. 

▲ 죽은 죽포 선생 실기
▲ 죽은 죽포 선생 실기

  흥해 최씨(興海 崔氏)는 경상북도 포항시 흥해읍을 본관으로 하고 있다.

  흥해 최씨(興海 崔氏)의 시조 최호(崔湖)는 고려 의종, 명종조에 삼중대광 문하시중(三重大匡 門下侍中)ㆍ신호위상장군(神虎衛上將軍) 등을 역임하였으며,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에 책훈되고 곡강부원군(曲江府院君, 곡강(曲江)은 흥해(興海)의 다른 이름)에 봉해졌다.

  흥해(興海)는 앞에서와 같이 경상북도 포항시에 속해있는 지명으로, 본래 신라의 퇴화군(退火郡)인데, 신라 경덕왕이 의창군(義昌郡)으로 고쳤고, 고려 초에 흥해(興海)로 고쳐 현종 때 경주부(慶州府)에 속하였으며,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내려왔다. 

  흥해 최씨의 분파는 김해파(金海波), 밀양파(密陽派), 거창파(居昌派), 자인파(慈仁派), 경산파(慶山派), 나주파(羅州派), 대구파(大邱派), 사량파(思良派), 청도파(淸道派), 노산파(魯山派), 시흥파(始興派), 합천파(陜川派), 이천파(利川派), 하대대파(下大垈派), 서울파, 양평파(楊平派) 등의 지파가 있다고 하였다.

  현재 용성면 곡신리는 총 70여 호 중 흥해 최씨가 1/3, 영천최씨가 1/3, 나머지가 타성바지이다.

  임란 공신인 죽은 죽포 선생을 기리는 용산서원은 지금의 경산시 용성면 곡란리 449에 건립되어 있다. 용산서원의 전신인 영모재(永慕齋)는 자인지역 유림에 의해 조선 인조 13년(1635)에 창건해 임진왜란 공신인 죽은(竹隱) 최팔개(崔八凱)와 그의 동생 죽포(竹圃) 최팔원(崔八元)을 배향했다. 

▲ 용산서원(龍山書院), 용성면 곡란리 소재
▲ 용산서원(龍山書院), 용성면 곡란리 소재

  고종 5년(1868) 서원철폐령 때 훼철되었다가 뒤에 용산서원으로 재건했다. 

  후손 최성달씨에 의하면, 1977년 용산서원 수임으로 있던 현풍 곽상문의 발의로 1987년에 유림에서 서원 향례로 행사하도록 결의한 후 용산서원(龍山書院)이라고 했다고 하였으며, 현재도 당시 청도 김상대가 쓴 용산서원 편액(扁額)을 강당(講堂)에 보관해 놓고 있다. 

  곡란리에 건립한 현존하는 용산서원은 정면(正面) 4칸, 측면(側面) 1칸 반 규모 팔작지붕건물인 강당(講堂)과 그 뒤에는 사당(祠堂)으로, 경의사(景義祠)가 3칸 규모로, 맞배지붕을 올렸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