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빙고 이야기

  • 기사입력 2023.04.29 09:41
  • 기자명 송하 전명수

  한더위를 이겨내려면 냉장고가 한 한몫을 톡톡히 하게 된다. 그런데 냉장고가 등장하기 이전의 옛 선인들은 어떻게 여름나기를 하였을까? 궁금하게 여기든 차에 석빙고가 그 역할을 해왔다는 사실을 알고 석빙고(石氷庫)를 찾아보기로 하였다. 서울에는 동빙고와 서빙고가 있었는데 이는 모두 나무로 된 목빙고(木氷庫)였는데 그 위치만 알 수 있을 뿐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전국 지역마다 설치하였던 석빙고 중에 지금까지 보존되어오는 석빙고는 모두 18세기에 설치하였는데 경주 월성, 안동 낙동강 변과 청도 화양, 창녕, 영산, 현풍 등 6곳이 보존되어 있다. 그래서 비교적 가까운 곳에 위치하여있는 현풍, 창녕, 영산 석빙고를 찾아보았다. 

  석빙고는 냉장고와 달리 아무런 기계장치도 없이 1년 내내 얼음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게 여겨진다. 냉동실에 보관 중인 얼음이나 아이스크림은 조금만 문이 열려있으면 곧 녹아버리는데 석빙고는 어떻게 열의 이동을 차단하는지 몹시 궁금해진다. 열의 이동을 차단하는 것을 단열이라 하는데 열의 이동을 잘 막기 위해서는 전도(傳導), 대류(對流), 복사(輻射) 등이 잘되지 않게 해야 한다. 단열이 잘 되면 따뜻한 것은 더욱 따뜻하게, 차가운 것은 더욱 차갑게 보관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여름철에 궁중은 물론 중앙의 고위 관리들이 사용할 얼음을 관리하기 위한 기구로 장빙고(藏氷庫)라는 기관이 있었다. 장빙고에서는 겨울철에 한강의 얼음을 채취하여 궁중의 얼음창고인 동빙고와 서빙고에 저장하였다. 얼음은 추운 겨울인 12월에 채취하여 저장하였다. 경국대전의 예전 반빙조에 의하면 ‘해마다 여름철 끝 달 즉 음력 6월에 여러 관사, 종친과 문무관 중의 당상관, 내사부의 당상관, 70세 이상의 퇴직 당상관들에게 얼음을 나누어준다. 시제(時祭)에도 얼음을 지급하며 활인서의 병자들과 의금부와 전옥서의 죄수들에게도 지급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70세 이상의 당상관에게는 3일마다 얼음 한 덩어리씩 나누어 주었다. 얼음을 하사받은 관리들은 보통 관혼상제에 필요한 음식 마련과 신선한 음식 유지를 위하여 사용하였다. 

  수백 년 전 한여름에도 완벽하게 얼음을 저장하였던 석빙고는 매년 2월 말 강가에서 두께 14cm 이상의 얼음을 잘라내 저장한 뒤 6월부터 10월까지 수시로 그 얼음을 다시 꺼내 더위를 물리쳤던 선조들의 지혜가 돋보인다. 석빙고의 얼음 저장은 두 단계로 나뉜다. 얼음 저장에 앞서 한겨울 동안 빙고의 내부를 냉각시키는 단계와 얼음을 넣은 뒤 7, 8개월 동안 차갑게 유지하는 단계이다. 석빙고 내부를 미리 차갑게 만들어 놓는 일은 얼음 저장에 있어 가장 기본적인 작업이라 하겠다. 경주석빙고의 겨울철 내부온도는 평균 영하 0.5℃~영상 2℃로 일반 지하실 내부온도가 15℃ 안팎이라는 사실과 비교해 보면 석빙고 내부가 얼마나 차가운지 쉽게 알 수 있다. 석빙고 출입문 바로 옆에 세로로 붙어있는 날개벽이 설치되어 있다. 겨울철의 찬바람은 이 날개벽에 부딪히면서 소용돌이로 변하고 그로 인해 더욱 빠르고 힘차게 내부 깊은 곳까지 밀려들어 간다. 

  얼음을 저장하고 봄, 여름을 지나면서 일부 녹기는 하지만 미미한 정도였는데 찬 기운을 유지할 수 있는 원리는 절묘한 천장 구조에서 나타난다. 화강암 천장은 1~2m의 간격을 두고 4, 5개의 아치형으로 만들어져 있다. 각각의 아치형 천장 사이는 움푹 들어간 공간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이 바로 비밀의 핵심이다. 내부의 더운 공기를 밖으로 빼내는 일종의 에어포켓인 셈이다. 

  얼음을 저장하고 나면 내부 공기는 미세하지만 조금씩 더워진다. 여름에 얼음을 꺼내기 위해 수시로 문을 열어야 하니 더욱 그러하다. 더운 공기는 위로 뜨고 이 더운 공기가 뜨는 순간 에어포켓에 갇혀 꼼짝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에어포켓 위쪽의 환기구를 통해 밖으로 빠져나가도록 하였으니 그 완벽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해서 내부온도는 초여름에도 0℃ 안팎에 머물렀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바닥의 배수로와 빗물의 침수를 막기 위하여 석회와 진흙 방수층, 얼음과 벽, 천장 사이에 채워 넣은 밀짚, 왕겨, 톱밥 등의 단열재, 햇빛을 흐트러뜨려 열의 전달을 방해하는 외부의 진디 등에서 완벽한 단열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처럼 완벽함도 겨울철 날씨가 추워야만 빛이 난다. 얼음이 제대로 얼지 않으면 석빙고는 무용지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옛사람들은 그래서 겨울 날씨가 포근할 때면 추위를 기원하는 기한제(祈寒祭)를 올리곤 하였다.

  경주석빙고는 신라시대의 얼음창고라 하는데 지금의 석빙고는 비석과 입구의 이맛돌에 의하면 1738년(영조 14)에 나무로 된 빙고를 돌로 축조하였다는 것과 4년 뒤에 서쪽에서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는 내용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경주석빙고는 규모나 축조 기법에서 뛰어난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경북 경주시 인왕동 449-1번지에 위치하여있는 경주석빙고는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이 석빙고는 환기구를 이용하여 더운 공기를 밖으로 빨리 빠져나가도록 하였고 밖의 열은 안으로 쉽게 들어오지 못하도록 진흙과 석회 등으로 지붕을 덮어 열의 유입을 차단하였다. 바닥에는 경사진 배수로가 있고 위에는 잔디를 심어 태양열 때문에 지표면이 뜨거워지지 않도록 하였다. 석빙고는 얼음을 만드는 시설이 아니라 만들어진 얼음을 잘 녹지 않도록 보관하는 창고이다. 석빙고의 얼음은 제사를 지낼 때 신선한 음식을 올리는 일과 더위에 지친 사람들에게 얼음을 주는 목적으로 보관하였다.

  안동석빙고는 경북 안동시 성곡동 산225-1번지에 위치하여있으며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이곳의 석빙고는 낙동강에서 많이 잡히는 은어를 국왕에게 올리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1737년(영조 13)에 지어졌다. 석빙고의 형태는 동서로 흐르는 낙동강 기슭의 넓은 땅에 강줄기를 향하여 남북으로 길게 누워 있으며 입구는 특이하게 북쪽으로 내었다. 안으로 계단을 따라 들어가면 밑바닥은 경사져 있으며 중앙에는 물이 강으로 흘러가도록 만든 배수로가 있다. 천장은 길고 크게 다듬은 돌들을 무지개 모양으로 틀어 올린 4개의 홍예를 세워 무게를 지탱하도록 하고 각각 홍예 사이는 긴 돌들은 가로로 채워 마무리하였다. 천장의 곳곳에는 환기 구멍을 두었는데 이는 내부의 온도를 조절하기 위하여 설치한 것으로 바깥까지 연결하였다. 전체적으로 규모가 큰 편은 아니나 보존상태는 양호하다. 특히 석빙고는 그 위치가 매우 중요한데 안동 댐 건설로 수몰될 위기에 처하여 지금은 본래의 위치보다 높은 곳에 옮겨 복원하였다. 이전에는 바로 옆에 강이 흘러서 얼음을 운반하기에 아주 쉬웠을 것이다. 

                                                                 창녕석빙고
                                                                 창녕석빙고

  창녕석빙고는 경남 창녕군 창녕읍 송현리 288번지에 위치하여있으며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창녕군 명덕초등학교 건너편 도로변에 언덕처럼 보이는 것이 이 석빙고이다. 서쪽으로 흐르는 개울과 직각이 되도록 남북으로 길게 지었으며 입구를 남쪽으로 내어 얼음을 쉽게 옮길 수 있도록 하였다. 입구 안의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밑바닥은 경사졌고 북쪽 구석에는 물이 빠지도록 배수구를 두었으며 바닥은 네모나고 평평하다. 내부는 잘 다듬어진 돌을 쌓아 양옆에서 틀어 올린 4개의 무지개 모양 띠를 중간중간에 두었다. 각 띠 사이는 긴 돌을 가로로 걸쳐 놓아 천장을 마무리하였다. 또한 천장의 곳곳에는 환기 구멍을 두어 더운 공기를 빠져나가게 하였다. 이 석빙고는 입구에 서 있는 비석의 기록을 통해 1742년(영조 18) 당시 이곳의 현감이었던 신서(申曙)에 의해 세워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각부 양식 또한 조선 후기의 모습이 잘 담겨져 있어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창녕영산석빙고는 경남 창녕군 영산면 교리 산10-2번지에 위치하여있으며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화강석으로 쌓은 조선 중기의 얼음창고이다. 정확한 축조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여지도서와 조선 후기의 창녕 읍지(邑誌)에 따르면 현감 윤이일이 세웠다고 한다.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높고 뒤쪽으로 갈수록 낮은데 전체적으로 둥근 모양이다. 내부는 거칠게 다듬은 큰 돌로 쌓은 네모진 형태이다. 석빙고에서 바라보면 뒤쪽 끝으로 개울이 있는데 지금은 개울에 물이 말랐지만 이는 상류에 제방을 막았기 때문이며 옛날에는 수량(水量)이 풍부하였다고 한다. 다른 석빙고에 비하면 약간 작은 규모이나 쌓은 수법은 동일하다. 

  청도석빙고는 경북 청도군 화양읍 동천리 285번지에 위치하여있으며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양쪽 벽으로 이어주던 반원 아치 형태의 홍예 4개가 남아있을 뿐 천장은 완전히 무너져 불완전한 상태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남아있는 우리나라 석빙고 가운데 경주석빙고 다음으로 큰 규모이고 쌓은 연대도 오래된 것이다. 동서로 길게 뻗어있는 구조이며 서쪽에 출입문을 두었고 계단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면 경사진 바닥이 보인다. 가운데는 물이 빠지는 도랑을 두었고 동쪽에 구멍을 내어 석빙고 밖의 작은 개울로 물이 빠지도록 하였다. 환기 구멍을 뚫어 놓았던 것으로 생각되나 지금은 어디인지 알 수가 없다. 석빙고의 왼쪽에는 비석이 서 있는데 옆면에는 공사에 동원된 인원수, 사용한 재료, 비용 등을 기록해 놓았다. 뒷면에는 비를 세운 날짜와 함께 관계된 사람들의 이름을 새겨 놓았다. 그중에 계사(癸巳)년이라는 기록이 있어 1713년(숙종 39)에 축조된 것으로 짐작된다.

                                                              현풍석빙고
                                                              현풍석빙고

  달성 현풍석빙고는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면 현풍동로 86(상리)에 위치하여있으며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남북으로 길게 축조되어 있으며 출입구가 개울을 등진 능선 쪽에 마련된 남향 구조이다. 돌의 재질은 모두 화강암으로 외부에서 바라보면 고분처럼 보인다. 입구는 길쭉한 돌을 다듬어 사각의 문틀을 만든 후 외부 공기를 막기 위해 돌로 뒷벽을 채웠다. 외부는 돌을 쌓고 점토를 다져서 흙을 쌓아 올렸다. 잘 다듬어진 돌로 벽과 천장을 쌓았는데 천장에는 무지개 모양의 홍예를 4개 틀어 올리고 그 사이사이에 길고 큰 돌을 얹어 아치형을 이루게 하였다. 천장에는 통풍을 위한 환기구가 두 군데 설치되었고 빗물에 대비한 뚜껑이 있다. 바닥은 평평한 돌을 깔고 중앙에 배수구를 두었다. 당시에는 얼음창고가 마을마다 설치된 것이 아니었음에도 규모가 적은 현풍 고을에 이러한 석빙고를 세운 일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1982년 석빙고 주위의 보수 작업을 할 때 축조연대를 알려주는 건성비(建城碑)가 발견됨으로써 1730년(영조 6)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게 되었다. 

  창녕석빙고에서 잠시 생각에 잠겨 보았다. 낙동강이 꽁꽁 얼어붙은 한겨울에 두꺼운 얼음을 채취하는 일, 운반하는 일이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변변하게 입을 거리도 없었던 그 시절에 석빙고를 채우는 일에 동원된 젊은이들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얼마나 춥고 고통스럽게 얼음을 채취, 운반하여 빙고에 쌓아 올렸겠는가 말이다. 수많은 사람이 살아가기가 어렵다고 하지만 그래도 물자가 풍부한 시대에 살고 있으니 스스로 행복하다고 해야겠다. 그리고 냉장고의 고마움도 잊지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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