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장대의 메아리

  • 기사입력 2015.12.21 13:04
  • 최종수정 2015.12.21 13:05
  • 기자명 김종국 객원기자


 
  ▲ 금장대의 메아리
  경북 경주시 석장동 금장대(金藏臺), 그 아래 유유히 흐르는 경주 서천, 한눈에 펼쳐지는 경주시가지, 여기는 신라시대부터 이어지는 수려한 경관으로, 그 경치가 매우 빼어나 경주의 하늘을 지나가는 기러기들이 쉬었다 간다하여 경주지역의 여덟 가지 기이한 현상 삼기팔괴(三奇八怪) 가운데 금장낙안(金藏落雁)이라 불리는 명승이다.
  신라 자비왕 때 기생 을화의 죽음과 함께 애틋한 전설이 전승되는 이곳 금장대 일대 예기청소(藝妓淸沼)는 형산강 본류인 경주 서천과 북천이 만들어내는 김동리의 단편소설 <무녀도>의 배경이 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유유히 흐르는 서천, 그 깊은 강물 속에는 임란전투의 아픈 사연과 수많은 지역의병들의 아우성이 감춰져 있다.

  ▲ 임란 당시 경주부 의병총지휘본부가 되었던 금장대

  그곳에는 1592년 임진왜란 발발 시 왜적의 포위망에 들었던 경주읍성을 탈환하기 위하여 당시 경주부의 관할에 봉기한 각 지역 의병들의 집결지였던 서천전투 지휘 본부가 있던 곳으로, 왜군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군대 2만 2800여명이 동래부, 기장, 울산을 거쳐 4월 21일 경주읍성을 점령함에 따라 경주읍성은 그들의 주요 병참기지가 되었다.
최효식의 ‘경주부의 임란항쟁사’에 의하면, 경주성 부윤 윤인함은 61세의 고령으로 박의장이 부윤직책대리를 맡았고, 윤인함은 포장장을 맡아 패잔병과 흩어진 병사와 도망간 병사들을 모아 전투에 참여하게 하였다고 한다.
  이후 조선 선조 25년 6월 9일, 영남의 12고을의 의병장 132명이 경주 남천의 상류인 월성에 모여 문천회맹을 맺고, 경주읍성의 탈환을 결의하고, 그해 7월 27일 영천읍성을 탈환한 후, 그 여세를 몰아 8월 21일과 9월 7~8일 2차례에 걸쳐 경주읍성을 탈환하기 위해 대규모 전투가 벌였다. 이 때 경주읍성 탈환에 참여한 고을 및 병력 수는『선조수정실록』,『징비록』,『난중잡록』,『제조번방지』등에 16읍 1만여 명에 달하였다 하였고, 손엽의『용사일기』에는 11읍 3만 7000여 명, 최락이 지은『경주 선생안』에는 16읍 5만여 명이 창의하였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때 왜군은 경주부에 참여한 지역의병들의 동태를 파악하고, 이에 대처하기 위하여 경남 언양에 주둔한 병력을 뽑아 경주읍성 근처와 백률산, 경주향교 등에 매복시키고, 경주부에 집결한 관군과 지역의병들은 8월 21일 경주성문 앞에 도착, 읍성이 내려다보이는 이곳 금장대에 경주부 총괄지휘본부를 설치하고, 금장산 정상에서 아군의 활동을 지휘하고 적의 동태를 살피었다.
  여기서 필자는 경산임란의병장 후손인 김상조(70)씨의 도움을 얻어 경주지역 의병활동 현장을 답사하면서 이야기로만 듣던 금장대가 임란당시 경주부의 의병 총괄지휘소였다는 여러 기록을 접하면서 가슴이 메여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금장대 누각에 올라 서천에 유유자적한 청둥오리 떼만 바라다보며 선현들의 구국의지와 그들의 아우성을 생각하며 고개를 숙였다.
  또한 필자는 경주 일대 금장대와 황성공원, 문천(蚊川) 등에서 낯익은 경산출신 의병장 김우용(金遇鎔), 김우련(金遇鍊)선생 형제분의 존명(尊名)이 새겨진 명문을 발견하고 가슴이 벅차올랐다.
  김우용, 김우련 형제분은 당시 경상도 자인현 출신으로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김우용, 김우련 형제는 최문병 위병장과 함께 경주읍성과 서천전투에서 고군분투하였던 경산 자인출신 의병이다.
  본래 경산지역은 의병의 고장이다. 최효식이 적은 ‘경주부 임란항쟁사’에 의하면, 임란 당시 경산에는 80여명에 달하는 지역의병이 창의하였고, 지역 내 1만에 달하는 의병들이 그들을 중심으로 봉기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하양현의 최문병 의병장의 ‘성재선생실기’와 하양현의 황경림 의병장의 ‘면와실기’, 경산현의 최대기 의병장의 ‘회당실기’는 1992년 임란 발발과 함께 자인에 최문병 의병장, 경산에 최대기 의병장, 고산에 박응성 의병장, 하양에 신해 의병장을 중심으로 현 단위로 명망 있는 선비와 문중 일문, 관군 등이 대거 참여하여 구국의지로 향토수호에 나섰고, 곡란에 최팔개, 최팔원 선생, 울옥에 김우용, 김우련, 김응광선생이 경남 의령전투와 화왕산 전투에 참전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는 기록들은 그들 후손이 남긴 실기를 통하여 이미 알려져 있는 바다.
  하지만 급변하는 산업화 속에 살아가는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역사 속에 남아있는 하나의 기록으로만 생각하고, 그 속에 옛 선인들의 메아리는 읽어내지 못함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어쩌면 세상 사람들은 저 유유히 흐르는 경주 서천의 수면과 같이 물은 보고 물소리는 듣지 못하는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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