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취재 3] 경산지역 임란창의는 경북의병사의 금자탑이다.

하양현(河陽縣) 편

  • 기사입력 2016.02.23 15:41
  • 최종수정 2016.02.23 15:47
  • 기자명 김종국 객원기자
   
▲ 표 1-1. 하양현 의병 항쟁도


  구 하양현(河陽縣)은 임란 당시 하양·안심·와촌·진량면 일부지역을 칭한다.

  이 지역은 동서로 금호강을 끼고 있으며, 남으로 금박산, 북으로 무학산, 환성산, 팔공산이 병풍처럼 감싸고 있다. 지형적으로도 안심은 대구와 경계하고, 와촌은 신녕과, 진량은 자인현과 경계하고 있다.

  이와 같은 구 하양현의 지리적 환경은 예부터 향토방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오기도 하였다.

  먼저 당시 하양현 출신인 면와 황경림(黃慶霖) 의병장의 “면와실기(勉窩實紀)”에 의하면, 하양에도 임란 당시 초례산, 와촌면 일대 등지에서 왜적이 출몰하여 지역 내에 의병봉기와 적잖은 항쟁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면와실기”에는 하양에서 1592년 4월 19일 기장, 울산, 양산, 경주, 청도, 밀양이 모두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하였고, 이에 하양현 출신 황경림은 먼저 가속(家屬)을 청송 자하동(紫霞洞)으로 보내고, 사촌형 김거(金?)와 방어책을 논하기 위하여 현감을 만나 군병 소모문(召募文)을 각 면으로 전달하도록 청하고, 서당(書堂)에 모여 창의 격문(檄文)을 발송하였다.

  4월 22일, 신해(申海)를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유생 중 명망과 책략이 있는 사람을 택하여 모병(募兵)과 모속(募粟) 담당자로 임명하였다. 동년 4월 24일 효양산 아래에서 병력을 모았다. 당시 하양현의 군사 수백 명은 방어사(防禦使)군에 소속되어 남아 있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각 가정의 노비와 유생 중 싸울 수 있는 사람을 조사하였는데, 관군과 합해 보니 겨우 4백여 명에 불과하였다. 무기가 부족한 것은 미리 정한 담당관으로 하여금 기한을 정해 만들도록 하였고, 또한 붉은 천을 찢어 깃발을 만들고, 그것에다 크게 ‘분충장의정용군(奮忠仗義精勇軍)’이라고 썼다. 그리고 무학산(舞鶴山) 가장 높은 곳에 척후병(斥候兵)을 배치하고 꽹과리와 함성으로 원근에서 접근하는 적병을 교란하였다.

  아래 표 1-1과 같이 4월 25일 왜적(倭敵) 100여명이 지금의 와촌면 일대에 침입하여 민가를 약탈함으로, 신해가 의병과 함께 대적하여 크게 격파하였다.

  4월 26일에는 신녕(新寧)에서 권응수(權應銖)가 기병(起兵)하여 왜군을 방어함에, 전령을 보내 상호 지원하기로 약속하자, 4월 27일 경산에서 최대기(崔應淡의 初名) 의병장이 병사를 이끌고 와 합세하였다. 5월 2일 신해와 최대기(崔大期)가 권응수 군에 배속되기를 원하여 대구 최동보(崔東輔)에게 편지를 보내 뜻을 함께 하기로 하였다. 동년 5월 5일 신해는 “우리 고을은 작은 읍이어서, 왜병이 반드시 침입하지 않을 것이다. 간간이 흩어져 약탈하는 왜군은 실로 걱정할 것이 못된다.”고 말하고, 전군을 통솔하여

  표 1-1. 하양현 의병 항쟁도

  신녕으로 가고자 황경림을 찾아 동행하기를 원했다. 이에 황경림은 “병가(兵家)의 근심은 항시 적을 소홀히 생각하는데 있다. 만약 허점을 노려 외로운 성을 엿본다면 무엇으로 방어할 수 있겠는가? 군사를 나누어 각기 주둔하여 있으면서 그 변화를 엿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대답하자 신해 의병장은 최대기 의병장과 정예병 2백을 선발하여 당일로 권응수군에 합류하였다.

  5월 9일, 가까운 곳에 피난 갔던 사람들이 차츰 돌아왔다. 황경림 의병장은 낮에는 수풀 속에 깃발을 내걸고, 밤에는 한 사람이 세 개의 횃불을 양손에 들어 병력 수가 많은 것처럼 기만했다. 또 병력을 나누어 요지를 지키도록 하고, 징을 울려 상호 신호를 하였다. 이때 왜군 수백이 경계를 침범하여 노략질을 하므로, 깃발을 세우고 북을 두들기며 해당 지역을 방어하자, 왜군이 놀래 물러감으로 계속 추격하고자 하였으나, 병력과 무기가 미비하여 주둔지를 튼튼히 하고 출병하지 않았다. 5월 10일 추가로 뽑은 의병이 70여 명에 불과하여, 경산과 자인으로 격문을 돌려 450여 명을 얻게 되어 비로소 군용을 떨치게 되었다. 5월 13일, 왜군이 초례산중에 주둔하고 있으면서, 사방으로 약탈을 함으로써 도로가 불통되었다. 이에 병력 100여 명을 산꼭대기로 보내 돌을 모으고 깃발을 세우고, 큰 소리로 북을 울려 장차 엄습할 것처럼 하면서 해 지기를 기다려 불이 보이거든 하산하여 접전하도록 명령하였다. 정병 300명을 뽑아 산 밖 취약지점에 매복하게 하고, 민가의 이엉·가벼운 돌·땔나무·인화물질을 가지고 몰래 사방에서 포진하게 하고, 돌격대 30명으로 샛길에서 동시에 불을 질러 왜군이 놀래 감히 산으로 오르지 못하도록 하였다. 왜군이 모두 산 밖 불이 없는 곳으로 나오자, 복병이 일시에 돌격하고, 산 정상에 매복한 의병들이 일제히 북을 치고 내려오면서 양면공격으로 왜군을 격파했는데, 이때 왜군의 목을 20여 급이나 베었다.

  7월 18일 신해 의병장이 영천에 있으면서 황경림 의병장을 불러 함께 힘을 합쳐 왜군을 토벌하자고 청하매, 당일로 3백 명을 선발하여 도착했다. 7월 19일 유봉산 아래 병력을 집결하여 7월 24일 추평에 진을 치고, 영천성을 수 겹으로 에워쌌다. 이와 같이 영천성 회복에는 시간을 다투는 긴장의 연속이었다. 이때 하양현의 의병은 자전자수(自戰自守)의 원칙에 입각한 철저한 향토방위군 역할을 감당하였다. 하양 의병장 황경림은 향병으로 우선 내 고을을 지키고, 그리고 여력이 있을 때 타 군·현의 지원에 나섰다. 그리하여 주로 하양현 역내에서 와평, 초례산, 도리촌, 금호강, 경산 반야, 창암 등에서 소규모 전투를 벌였고, 왜군과의 충돌이 없을 때는 영천성 복성전투, 달성전투, 화왕산성 수성전투 등에 참여하였다.

  필자는 먼저 하양현의 의병장 개별 유적 및 유물을 살펴보기에 앞서 하양 임란 팔의사비와 임진하양의군위령비를 찾았다. 먼저 찾은‘임란창의하양제공사적비(壬亂倡義河陽諸公事蹟碑)’는 구 하양읍사무소 전정에,‘임진하양의군위령비(壬辰河陽義軍慰靈碑)’는 하양공원 내 세워져 있었다. 여기에는 하양인들의 자존심과 같은 분노와 충의 의지가 담겨져 있었고, 특히 의군위령비에는 이들의 명예회복의 간절한 소망이 담겨져 있었다.

  이어 구 하양현의 의병창의의 주역인 신해 의병장과 황경림 의병장의 유적과 유물을 찾아보았다. 먼저 신해 의병장의 유적과 유물은 하양읍사무소에 세워진 임란창의하양제공사적비(壬亂倡義河陽諸公事蹟碑)에서 그의 행적을 살펴 볼 수 있었고, 하양읍 남하리에 집거한 청도 김씨 문중에서 1988년 4월에 세운 의병장의 묘갈명을 통해 신해 의병장의 의병항쟁기를 채록할 수 있었다.

  현존하는 신해(申海) 의병장의 유적으로는 사진 1-1에서와 같이 하양 무학산(舞鶴山) 기슭에 모신 의병장의 묘소와 의병장을 기리는 묘비, 장군석, 혼유석, 장대석 등을 찾아볼 수 있었다.

  황경림(黃慶霖) 의병장의 유적 또한 장수 황씨 후손들에 의해 사진 1-2와 같이 보존되고 있었고, 최근 대구시 동구 혁신도시지구인 동내동 일대에서 그의 사우(祠宇)와 묘역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사진 1-2. 대구 혁신도시 지구에 편입된 동내동 황경림 의병장 사우

  하지만 의병장의 구국의지와 충의 앞에 너무나 작아진 필자는 임의 고귀한 충의에 고개 숙이며, 너무나 죄송하고 부끄러운 마음만 그지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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