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취재 4] 경산지역 임란창의는 경북의병사의 금자탑이다.

자인현(慈仁縣) 편

  • 기사입력 2016.03.16 01:50
  • 최종수정 2016.03.16 01:58
  • 기자명 김종국 객원기자

 
  구 자인현 구역은 지금의 자인면, 용성면, 남산면과 진량읍 마곡, 현내리 일부지역이다.
자인현은 지형적으로, 동으로 구룡산, 남으로 대왕산 북으로 금박산과 경계하고, 현의 중앙은 구룡산 산괴(山塊)가 형성한 수계(水系)가 길게 경산현 구역과 연결하는 오목천(烏沐川)이 젖줄 되어 흐른다. 현의 지리적 환경은 동남으로 구룡현(九龍峴), 회곡현(回谷峴), 갈현(葛峴)이 청도군과 경계하고 있어 무엇보다 동남계의 경계가 중요시되고 있는 지역이다. 이러한 우려는 1592년 4월 임란 발발과 더불어 현실적인 입장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자인현은 성재(省齋) 최문병(崔文炳) 선생을 통하여 1592년 3월 15일 임란이 발발하였음을 알게 되었고, 이로서 지역의 선비들과 의논하여 그달 17일 의병 창의를 결심하였다 했다.

표 1-1. 구 자인현 의병항쟁도
  이 사실을 적은 성재선생실기에서 그는 5월 2일 함께 피난한 수십 인과 사방에 통문을 띄워서 사람을 불러 모았다. 마침 김홍. 유인춘. 박영성 등 5, 6명과 함께 의병 봉기(蜂起)를 숙의하고, 모두가 최문병과 뜻을 같이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날로 모두가 천장산에 제단을 설치하여 하늘에 맹세하는 한편, 최문병이 그 자리에서 의병장으로 추대되었다.

  표 1-1과 같이 5월 11일 왜구들이 성현에서 오목천에 돌입하여 며칠 동안 진을 치고 있으면서 민가에 들어가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노략질 하였으므로, 백성들은 겁을 먹고 이리저리 흩어지며 안정을 찾지 못하였다. 이에 총대장 이상(李祥)에게 명하여 군사를 이끌고 돌격전을 개시하여 순식간에 수십 명의 적을 참획하였다. 이때에 최대기는 경산, 신해는 하양, 박경전은 청도에서 각각 의병을 일으켰는데, 의견이 상통하고 연락도 잘되어 요해지를 굳게 지켰으므로, 적들은 감히 경솔하게 침범하지 못하였다.

  5월 16일 적의 잔병 수백 명이 청도 중심으로부터 침입하여 자인 지방을 노략질하였는데, 최문병 의병장은 병졸을 거느리고 추격하여 동창까지 따라가 수백 명의 적을 참획 하고, 병기 수백타를 노획하였다. 또한 5월 20일에 정예군사 2천 여 명을 거느리고 청도의 박의병장과 함께 두곡에 주둔하고 있는 적을 공격하여 수백 명을 죽이고 조총 1백여 자루와 탄환 십여 두를 노획하였다.

  5월 24일 다시 군사들을 거느리고 선암(仙巖)으로 진격하여 5천여 명의 적들을 대파하니 적의 시체가 삼대(麻)처럼 무수히 쓰러졌으며, 물품 수십 타를 획득하였다. 이 싸움에서 살아남은 적은 겨우 백여 명 뿐이라 한다. 5월 27일에 환군하여 가지현에 도착하여 초유사 김학봉 이문과 합류하였다. 그 뒤부터는 백성들이 나라를 지키는 관장(官長)이 있다는 사실을 믿고 민심이 점점 바로 잡혀졌다. 5월 29일 7백여 명의 패잔한 적병이 밀양으로부터 임현을 넘어 동곡에 주둔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여러 장수들과 함께 이를 추격하니 적은 청도, 유천으로 모두 도망하였다. 6월10일 수백의 적병이 경주 아화로부터 영천을 지나 박산 아래까지 와서 진을 치자, 최문병 의병장은 좌대장 유인춘에게 천여 명의 의병으로 이를 공격하게 하여 적장과 3백여 명의 왜적을 참획(斬獲)하였다. 6월 14일 모든 의병장과 함께 군위의 적을 박연에서 격파하고, 다음날에 또 소계에서 싸워 적을 크게 물리쳤다. 7월 22일 최문병 의병장은 권의병장과 합세하여 하양에서 도망한 왜적을 대구에서 무찔렀다. 7월 23일 다시 의병을 이끌고 영천 추평에 나아갔다. 최문병이 7월 23일 모든 의병장들이 모여서 영천성의 적을 공격할 대책을 의논하고, 이에 제 의병장과 합세하여 의병 3천 5백여 명을 모집하였다. 7월 27일 아침에 성 밑에 이르러 성을 넘게 하였으나, 적들이 성을 굳게 지키고 반격하므로, 모든 장수들이 감히 먼저 성에 오르지 못하였다.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을 이용하여 화공을 시도한 결과 대승을 이루었다. 8월 5일 수백 명의 적이 자인 경내로 돌입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최문병 의병장은 영천에서 자인으로 환군하여 왜적을 하양까지 추격하여 모두 섬멸하였다. 이상은 자인현 최문병 의병장의 임란 항쟁사를 그의 실기를 통하여 살펴 본 것이다. 이 때 용성 곡란에 최철견 부자와 최준립은 용성에서 의병을 일으켜 영천 권응수 의병장과 합류하여 영천·경주 등지에서 왜적과 싸웠고, 특히 아화산성(阿火山城) 싸움에서 큰 공을 세웠고, 정유재란 때는 화왕산성 곽재우 의병장 휘하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또 용성면 곡신리 출신 흥해 최씨, 경산대장 최응담과는 3종간인 죽은(竹隱) 최팔개(崔八凱) 선생과 죽포(竹圃) 최팔원(崔八元) 선생은 임진년에 동래부사 송상현의 격문을 받고, 일족 및 마을 장정을 모아 동래로 향하다 경남 언양지역에서 적을 만나 30여 명을 베고, 그들의 말을 탈취했으며, 양산에서도 적을 무수히 참살, 뒤에 동래성의 적과 싸워 적장 조박붕을 베는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끝내 전사하였다.

  자인 울옥의 김우용, 김우련 형제는 1597년 7월 19일, 여러 지역의병장들과 함께 화왕산성 곽재우 의병장 휘하에 들어가 성중에서 큰 회합을 개최하였는데, 모두가 비분강개(悲憤慷慨)하면서 적신동맹을 맺으며 진충보국을 맹세하였다. 이 때 참여한 인사는 무려 6백여 명으로, 곽의병장의 창의록 용사응모록에 의하면, 이중 하, 자, 경 인사만 28명이었다는데, 하양현 박지원, 황경림, 김거, 자인현 김진, 이창우, 이광후, 김우용(金遇鎔), 김우련(金遇鍊), 김응광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대구지역 전투에서는 조선 선조 29년(1596년) 3월 3일에 전투 결의에 참여한 인물이 자인현은 김우련, 김우용, 전극찬 등 모두 8명이다. 이보다 앞선 선조 25년 6월 9일에는 경주지역 남천변 전투에서 자인현 출신으로 김우련, 김우용, 전극창 등 모두 9명이 참여하였다.

  또한 자인현 남산면 반곡 출신인 김응광은 5월 7일 최문병이 자인현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그를 따라 5월 11일 오목천에서 적을 치고, 20일은 청도 두곡에서, 6월 27일에는 영천성 탈환을 위해 큰 공을 세웠다. 8월에는 자인현에 출몰한 왜적을 섬멸하였고, 1593년 8월에는 경주 아화전투에서 적을 물리쳤으며, 12월에는 경주 서악강에서, 선조 27년 1594년 5월에는 언양과 울산에서 왜적을 격퇴하였다.

  이밖에도 기록으로 여러 실기나 회맹록, 동고록 등에 등재되지 않은 명망 높은 의병창의 의사는 이루 헤아릴 수 없다. 하지만 현내(縣內)에 많은 의사들이 구국의지로 나라를 지키고, 향토수호를 위하여 왜적과 목숨을 걸고 싸웠지만 사진 1-2에서와 같이 최문병 의병장을 제외한 여타 의병장에 대한 남아있는 자료나 유물 등을 대부분 확인할 수 없음은 후대에 이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고민이 아닐 수 없다.
최문병 의병장 말안장

 

  
  
  

  
 

 

 

최문병의병장 문집 목판

 

 

 

 

 

 

 

최문병의병장 실기 목판

 

 

 

 

 

 

 


 

또한 자인현의 의병집결지로 알려진 현 자인면 울옥리(蔚玉里) 천장산(千丈山) 일대와 원당리 소재 인지재(仁智齋)의 복원 및 보존은 자인현 의병봉기와 관련한 중요한 현장 자료로, 이에 대한 향후 대책과 현창(顯彰)이 시급히 마련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 필자는 비록 부족한 학문이지만, 나름대로 지역에 남아 있는 실기자료를 중심으로 아직까지 완성은 되지 않았지만 ‘경산임란창의 목록’이란 초록(抄錄)을 정리하면서 그날의 임란구국창의의사님들의 호국의지와 향토사랑에 다시 한 번 두 손 모아 경건한 마음으로 추모하며 삼가 고개를 숙이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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