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취재 5] 경산지역 임란창의는 경북의병사의 금자탑이다.

  • 기사입력 2016.04.06 01:28
  • 최종수정 2016.04.06 01:30
  • 기자명 김종국 객원기자


 
  이글을 마치면서....

  지금까지 필자는 5회에 걸쳐 경산지역의 명망 높은 임란창의 의사(義士)들의 행적을 당해지역 의병장의 실기(實紀)와 묘갈명(墓碣銘), 그리고 유허비문(遺墟碑文)을 중심으로 개황적인 부분만 소개하였다. 하지만 다행스럽게 본 연구를 시도하면서 약 400여 쪽에 달하는 “경산임란창의목록”이라는 결과물을 남길 수 있었던 성과는 저의 부족한 글속에 등장한 4천여 경산임란창의 의사님들의 소명(召命)이라는 믿음에서 이 글을 마무리하면서 숙연한 심정으로 그간에 필자에게 용기를 주신 의사제위님께 성찰하는 마음으로 합장하며 고개를 숙인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경산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1592년 임란 발발과 더불어 이 지역출신 명망 높은 선비들과 4천여에 달하는 무명창의의사들이 향토 경산을 지켜내기 위하여 초개와 같이 목숨을 바쳤다. 하지만 필자가 창의 현장을 답사하면서, 또 남아있는 경산지역의 현대판 기록들을 확인하면서 고개를 들 수 없을 정도의 부끄러움을 느꼈다.

  먼저 1997년에 편찬된 경산시지외 다수의 기록이 그렇고, 그밖에 지역문화단체에서 발간한 임란관련 충의편의 기록에서 창의자의 수록 명단이 일정하지 못하다는 점, 이러한 기록이 후대로 계속 전승될 경우 과연 ‘경산의병사’가 어떻게 평가될 것인가에 대하여 큰 두려움을 가졌다.

  이제는 과거에 기록을 과거인의 책임으로 미룰게 아니라 현대인들이 이를 연구하고 바로잡아야 할 의무가 있다. 물론 지역을 위해, 또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경산지역의 임란창의 의병과 무명용사들이 훗날에 자신들의 이름과 업적을 남기기 위하여 목숨을 걸었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데서 최소한 우리들이 임들에게 갖추어야할 예우는 지켜야 한다는 점이다. 역사적 인물에 대한 예우와 위상정립은 그들에 대한 현창보다 먼저 시급한 과제는 그 당사자에 대한 역사적 인정이다.

  경산지역의 5대 의병장의 행적은 그간 대구광역시 승격과 관련하여 고산 안심지역이 대구시에 편입됨에 따라 최대기 의병장과 황경림 의병장, 박응성 의병장의 관할은 대구광역시에 소속되고, 지금은 최문병 의병장(자인면), 신해 의병장(하양읍) 등, 두 의병장의 의병기와 유적만이 경산시역에 남아있다. 자인현 구역에는 최문병 의병장의 묘역과 용계서원이, 신해 의병장은 구 하양읍사무소 전정에 임란하양팔의사비와 함께 그의 묘역이 남아있다. 또한 박응성 의병장의 묘역도 대구와 경계 지점인 남천면 산전리 대덕산 정상에 자리함으로 행정구역상은 경산시역에 속한 지역이다.

  우리는 선인들의 구국정신과 충의 정신을 계승하고 추모하는 방안으로 부족하지만 지금부터라도 의사(義士)들을 추모하는 공간 조성과 이를 선양하는 학술세미나 등을 통하여 선현들의 업적을 굴절 없이 전승시키고, 이를 청소년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는 충효정신을 배양할 방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필요에 따라 이에 대한 기념공간과 추모공원 조성방안 등은 관할 자치단체가 고민하여야 할 몫이다. 이는 경산현 창의록에서 살핀바와 같이 경산 대장(代將) 최대기는 임란을 스스로 평정하지 못하고 병상에서 죽음을 맞이함이 부끄러워 그의 아들을 불러 놓고 그간 남긴 업적(業績)과 명예(名譽)를 모두 불태우고, 심지어 자신을 의병장으로서 불렀던 최대기(崔大期)란 이름마저 부끄러우니 최응담(崔應淡)으로 바꾸어 달라는 유명(遺命)을 남겼다는 점 등을 다시 한 번 상기하며, 그가 남긴 메시지 속에 깊은 뜻을 간과하여서는 아니 될 것이라는 필자의 부족한 생각에서 감히 이를 제안하고자 한 것이다.

  임란 발발 당시 창의와 의병 봉기는 거의 전국적으로 일어난 사실이라 하지만, 그들에 대한 예우는 너무나 큰 차이를 두고 있다는 점을 필자는 본 연구와 더불어 접하게 되면서 부끄럽고 죄송한 마음 금할 길 없었다. 물론 몰라서 그랬다는 변명도 할 수 있겠지만, 27만이 살아가고 있는 경산의 정체성이라면 당연 임란창의 의병들의 고장이라는 점이 무엇보다 으뜸일 터인데, 그 주역들에 대하여 우리가 무엇을 하였나 하는 생각만 하면 가슴이 답답해질 뿐이다. 비근한 예로 인접에 있는 대구 수성구 소재 고산서당(구 경산현 구역) 경내에 최근에 건립한 임란창의 상징탑을 바라보면서 그 속에 적어 놓은 낯익은 이름들(경산출신 의사) 속에서 고맙고 부끄러운 마음에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물론 경산에도 창의 의사 후손들이 건립한 사우(祠宇)도 있고, 하양읍 구읍청사 전정에 ‘하양임란창의비’와 하양공원에 ‘임진의군 위령비’가 세워져 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4천여 명의 창의의사가 봉기한 의병의 고장이라는 위상을 대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를테면 인접 경주지역 황성공원의 임란공원 조성, 영천성 복성지역의 추모공원, 청도 두곡지역의 현창, 경남 의령지역의 의병공원 등은 모두가 지방자치단체의 성숙된 모습을 과시하는 무형의 역사적 자산이라는 점이다.

  경산은 다행히도 당시의 항쟁실기가 남아있고, 의병장의 묘역과 유허비의 행적도 분명히 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역사성을 현창하는 데는 물의가 없을 것이다. 실기의 내용에 있어서도 문학성이 있고, 집필 또한 난중일기형식으로 독창성이 있으며, 무엇보다 실기 속에 등장하는 당시의 사회상과 이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성격들이 분명하게 표현되고 있다는 점에서 경산지역 임란사를 연구하는 데 더 없는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는 점은 높이 평가할 수 있다. 이외에도 묘갈명, 유허비문을 통하여 실기에 수록되지 못한 점을 추가할 수 있다는 데서 문화재적 가치도 충분하다 할 수 있다.

  경산의 4천여 창의의사는 오로지 구국의지와 향토수호라는 대업을 달성하기 위하여 자발적으로 창의하고 봉기한 우리들의 선인이다. 여기에 뜻 있는 불교계 한 인사(주지)가 본지의 기사와 접하고 매일 같이 호국무명의사에게 추선 공양을 올리고 있다는 점은 단순 종교인으로서 책임감은 아닐 터이다. 그리고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경산시에서도 선뜻 이의 현창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겠다는 의지 표명에 그간에 걸머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것 같다.

  우리는 흔히 우리 경산이 역사적으로 그 어떤 재난에도 큰 피해 없이 이 땅을 지켜왔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 속에 경산임란창의 의사들과 같은 훌륭한 우리들의 선인들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에서는 인색하였다. 필자는 이를 부끄러워한다. 이제 부족한 필자의 글을 마무리하면서 다시 한 번 임란호국 무명의사께 고개 숙여 명복을 빌며, 그간 격려해 주신 많은 분들에게 감사를 드리는 바이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