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건국 대조영황제 1298주기 춘분대제 봉행

  • 기사입력 2017.04.07 10:44
  • 최종수정 2017.04.07 10:45
  • 기자명 김종국 문화부국장


▲ 고왕 대조영 황제 영정 및 제수 진설
  신라 삼국통일과 더불어 2국체제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 대발해국 고왕(高王) 대조영 황제의 1298주기 춘분대제가 1253년 영순현(지금의 상주·예천·의성)에 정착한 후 1592년 태순금(통정대부) 선생과 함께 현 경북 경산시 남천면 송백 2리로 전거(奠居) 해온 영순 태씨 집성촌인 발해마을에서 발해왕조제례보존회(회장 태재욱 76) 주관으로 발해국 고왕 대조영 황제를 추모하는 정유년 춘분대제(春分大祭)가 지난 3월 20일(음 2월 23일) 대조영 황제의 신위를 봉안한 송백 2리 고왕전(高王殿)에서 경산시기관단체장 지역유림, 후손 등 25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엄숙히 봉행되었다.

  이날 대제에는 초헌관 최영조(경산시장), 아헌관 태범석(한경대학교 총장), 종헌관 최덕수(경산시의회의장), 분헌관에 윤성규(경북도의회 의원), 최춘영(경산시의회 의원), 서재건(경산문화원장) 등 7명이 참여하였고, 집례는 태재륙(영순 태씨종회장)씨가 맡아 전통 제례의식으로 진행되었다.

  이에 태재욱 발해왕조제례보존회장은,“태씨·대씨는 동성(同姓)으로, 모두 대발해국 황제의 후손입니다. 오늘 대제의례 또한 황실의례를 갖춘 것입니다”하면서 태회장은 영순 태씨 집성촌인 송백 2리를 대발해국 설화마을로 조성하는 것이 평생의 숙원이라 강조하면서 이러한 발해마을의 염원이 최근 들어 부분적으로 가시화 되면서 대조영 황제 영정(국가표준영정 제86호) 및 흉상 등을 조성하였고, 2017년부터는 마을 안길 좌우 전통담장 개량, 대조영 황재 단소(壇所) 조성 등을 청사진을 제시하며, 이미 이를 위한 부지 일부를 확보해 놓은 상태라 피력하기도 하였다.

  대 발해국은 668년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는 대동강 이북과 요동 지방의 고구려의 땅을 평양에 안동 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하여 지배하였다. 이에 당나라는 고구려 유민 2만 8천여 가호를 중국 땅으로 강제 이주시켰는데, 이때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과 걸걸중상 부자가 고구려 유력층으로 분류되어 영주(榮州)로 끌려가게 되었다. 당시 이곳에는 고구려 유민을 비롯하여 말갈인·거란인 등 다수 민족이 집결되어 있었다. 

  696년 5월, 고구려 장군 출신인 걸걸중상(대중상)과 그의 아들 대조영은 고구려 유민·말갈인과 함께 영주를 빠져나와 전쟁의 피해를 거의 받지 않았던 만주 동부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이동도중 걸걸중상이 전사하면서 그가 이끌던 무리를 대조영이 인수받았다. 대조영은 추격해 오는 이해고, 당나라군을 천문령 전투에서 크게 무찌른 뒤에 만주 동부 지방에 남아 있던 고구려 유민과 말갈인을 규합하여, 698년 길림성 돈화현(敦化縣) 부근의 동모산(東牟山) 기슭에 진국(震國, 또는 振國)을 세웠다.

  당은 발해의 건국이 기정사실이 되고, 요서지역에 대한 돌궐(突厥)·거란·해(奚) 등의 압력으로 요하 유역과 만주 일대에 대한 지배가 사실상 어려워지자, 705년 사신을 보내 발해의 건국을 인정하였다. 713년에는 대조영에게 발해군왕이라는 형식상 관직을 수여하였지만, 대조영은 발해를 자주국으로 건설하기 위해 이를 거부했다. 돌궐과 일본, 신라 등도 이후 발해를 자주국으로 인정하게 된다. 하지만 916년 거란의 야율아보기가 부족을 통일하고, 거란의 왕이 되면서 중원 지방으로 진출하기 위해 발해를 배후 근거지로 인식하여 925년 음력 12월 말 발해는 요나라의 침입을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없었다. 결국 보름여 만인 926년 3월 1일(음력 1월 15일)에 멸망하였고, 발해 유민들의 부흥운동은 1116년까지 이어졌으나 모두 실패하고 말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일설에는 발해 멸망의 주원인을 백두산 화산 폭발과 연계하기도 하지만 이에 대한 구체적인 입증 자료는 확인할 수 없다.

  최근 중국의 동북공정과 관련하여 발해국을 부정하는 일련의 상황에서 우리의 역사바로세우기를 위한 발해국의 재조명은 시급한 국가적과제가 아닐 수 없으며, 여기 남천면 송백리의 발해마을 대조영 황제 후손들의 존재는 우리의 고대사를 고증하는 중요한 존재와 역할이 아닐 수 없다는 점을 간과 하였어는 아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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