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죽당 김응명 선생 유업 기리는 춘향대제 봉행

  • 기사입력 2017.04.07 11:30
  • 최종수정 2017.04.07 11:34
  • 기자명 김종국 문화부국장


▲ 경산시 용성면 덕천1리에 소재한 "상덕사"에
   향사를 올리는 후손 및 지역유림
  병자호란 때 왕의 피난처인 남한산성이 식량부족으로 청에 화의(和議)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와 스스로 삼락봉(三樂峯) 밑에 떼집을 짓고 은거하면서 푸른 대나무 천 그루를 심고 통곡하였다는 애달픈 사연의 주인공인 취죽당 김응명(金應鳴) 선생과 자인 복현(復縣) 운동에 선생과 함께 목숨을 걸고 앞장섰던 이광후(李光後), 이창후(李昌後) 선생을 기리는 정유년 춘향대제(春享大祭)가 지난 3월 19일(음 2월 22일), 2008년에 중수한 관내 용성면 덕천 1리 소재 남천서원(南川書院)에서 후손 및 지역 유림 등 다수가 참석한 가운데 봉행되었다.

  이날 향사에는 초헌관 김상두, 아헌관 김제혁, 종헌관 김재종, 집례에 김상조(전 국제종합기계 사장)씨가 맡아 전통 제례의식으로 진행되었다.

  이날 집례를 맡은 김상조(72)씨는 “자인현 복현(復縣) 운동과 병자호란에 의병을 일으킨 김응명 선생께서 우리 경주 김씨의 선조라는 점이 무엇보다 자랑스럽고, 후손들에게 홍복(洪福)이 아닐 수 없다”하면서 앞으로 젊은 층 세분 선생 후손들의 보다 적극적인 참여를 주문하였다.

  온통 대나무밭 속에 둘러싸인 남천서원 상덕사(尙德祠)는 앞에서와 같이 1633년(조선 인조 11)에 자인현 복현(復縣) 운동에 참여한 김응명 선생을 비롯한 이광후·이창후 선생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 이 중 김응명(金應鳴) 선생은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집필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의하면, 1593(선조 26)∼1647(인조 25). 조선 후기의 유생으로,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이원(而遠), 호는 취죽당(翠竹堂)이며, 자인(慈仁) 출신으로 아버지는 경산지역 임란창의 의사 김우련(金遇鍊) 선생이라 하였다.

  선생은 1607년(선조 40), 15세 때 밀양영남루에서 치른 백일장에서 장원하였고, 이후 1614년(광해군 6)과 1617년(광해군 9)에 각각 향시 생원시 초시에 합격하였으며, 이어 1618년(광해군 10)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고, 일찍이 아버지의 뜻에 따라 한강(寒岡) 정구(鄭逑),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던 유학자로 알려져 있다.

▲ 상덕사가 소재한 남천서원 강당
  또한 선생은 성리학에 조예가 깊고 박식하였으며, 벼슬에 뜻이 없어 향리에서 연하천석(烟霞泉石) 사이를 소요하면서 독서에 힘썼으며, 1633년(인조 11)에 자인 복현(復縣)을 위하여, 방희국(方熙國)을 선두로 최두립(崔?立)·이시혐(李時?)·이창후(李昌後) 등 300여 명과 함께 자인이 경주부에 속하여 현민(縣民)이 부당한 대접을 받는다는 소(疏)를 올려 4년 후 실현을 보았던 인물로 기록하였다. 1647년 2월 26일 묘시에 선생께서 세상을 떠나시자 지역유생들과 현민이 슬픔을 감추지 못하였고, 선생의 장례는 사림장(士林葬)으로 거행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선생의 위패는 1700년(숙종 26), 당시 자인현 남천서원 상덕사에 배향된 후 연면히 이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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